“월북 언론인-문인들의 활동상 최후까지 재구성”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과거에 비하면 북한 언론과 문학 관련 자료에 대한 접근이 수월해진 편”이라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신간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소명출판)에서 정 교수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웠던 혼란의 와중에 언론과 문학이 겪은 수난과 역할을 서술했다. 특히 북한 기관지 ‘노동신문’ ‘민주조선’, 노동당 이론잡지 ‘근로자’, 각종 재판기록 등 북한 문헌을 꼼꼼히 찾아 북으로 올라간 공산주의자 언론인·문인들의 활동상과 최후까지 재구성했다. 언론과 문학을 함께 다룬 것은 1941∼53년의 시기에 많은 언론인이 곧 문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언론사와 문학사 연구에서 북한에 관한 연구는 미진한 상황이어서 이 분야를 개척한다는 심정으로 공들여 연구했다”고 밝혔다. 최근 들어 통일부가 북한의 문학잡지 ‘조선문학’ 영인본을 중국 옌볜(延邊)을 통해 들여오는 등 북한 언론과 문학 자료에 접근하기가 과거보다 수월해진 점도 연구에 도움이 됐다.
문학평론가 임화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기자 출신 박승원 등 남로당 계열의 언론인·문인 5명이 휴전 직후 정치재판을 통해 미제간첩 혐의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과정도 상세히 추적했다. 정 교수는 “임화는 1951년 북한이 최고의 예술인 7명에게 주는 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사형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해 가족까지 알거지로 전락한 것이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조선인 학생의 일본군 입대를 선동한 ‘반도학도 출진보’에 여운형의 글이 실린 것을 근거로 “여운형도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라고 밝혔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등 우파 인사의 친일에 대해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여운형 같은 좌파 인사에게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는 우리 사회 일부의 이중 잣대를 비판한 것. 그러나 그는 “여운형에게도 움직일 수 없는 친일의 정황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일생을 놓고 볼 때 항일 독립운동의 공적이 더 크다고 본다”고 썼다.
다음 집필 계획을 묻자 그는 “조선시대 관보인 조보(朝報)에서부터 현재의 신문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언론통사를 총 정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