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아내와 함께 TV 드라마를 보다가 부아가 돋았다. ‘나쁜 남자’가 여주인공의 마음에 감동의 쓰나미를 일으키는 장면에서였다.
“저런 남자가 오로지 한 여자를 위한 순애보를 쓴다는 게 말이 돼? 여자들은 왜 그런 환상을 품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고는 아내를 살피다가 흠칫 놀랐다. 감동의 눈물을 반쯤 머금은 험악한 눈과 마주친 것이었다.
남자가 저질렀던 그동안의 잘못이 하나씩 도마에 올려졌다. 모임에서 여자들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을 때 저쪽 편을 들어주었던 것, 출산 후 처음 맞이한 명절 때 친척들 앞에서 ‘바다코끼리’라고 불렀던 것 등.
드라마 몰입을 잠깐 방해한 죗값치고는, 오늘따라 유난히 가혹한 아내의 반응에 남자는 대꾸할 말을 잊었다. 지난주에 어머니의 변덕으로 생신을 두 번 했던 앙금이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분풀이가 끝나자 한마디를 남겨놓고는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나쁜 남자도 못 되는 ‘정말 나쁜 남자’인 주제에….”
‘정말 나쁜 남자’란 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휴대전화 메신저로 회사 후배에게 물어보았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나쁜 남자 흉내를 내는 나무늘보’란다.
반면 드라마 속의 나쁜 남자들은 ‘맹수’에 견줄 만하다. 강하고 무자비하니까 그토록 자신 있게 나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자들은 맹수가 자신에게만은 ‘충성스러운 개’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게 말이 되나.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남자는 팔을 괴고 모로 누워 아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아내는 고양이 같았다. 의심이 많고 콧대가 높아 친해지는 데 애를 먹었다. 다음은 강아지였다. 졸졸 따라다니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호랑이가 되어 있는 것일까. 예전부터 호랑이의 본성을 숨기고 있었는지, 아니면 살아가는 게 힘들어서 이토록 사납게 변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남들에겐 호랑이여도 나에게는 고분고분한 강아지.’
남자는 아내가 깰까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강아지로 돌아가라는 주문이라도 거는 것처럼.
한상복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