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거리에서 핀 ‘홍엄지교’… 묵향보다 진한 韓中우정의 여운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 서남쪽에 있는 고서적 및 골동품 상가 류리창(琉璃廠). 이곳은 조선 사신들이 중국 지식인들과의 교우와 서적 구입을 위해 반드시 들렀던 명소다. 실학자 홍대용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등이 모두 이곳에서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1765년 조선 북학파의 선구자인 홍대용과 친분을 쌓은 엄성이 머물렀던 베이징 시 시청(西城) 구의 간징(甘井) 골목. 당시 명칭은 건정동(乾淨동)이어서 홍대용은 엄성과의 교류 내용을 ‘건정동필담(乾淨동筆談)’으로 펴냈다.
1765년(영조 41년) 겨울 동지사행(冬至使行)의 일행으로 북경(베이징)을 찾게 된 홍대용은 당시 서점거리였던 북경 유리창에서 엄성과 만난다. 두 사람은 이때 단 한 번, 20여 일간 얼굴을 마주 보고 세상사에 대해 필담을 나누면서 ‘홍엄지교’로 불릴 만한 우정을 쌓았다. 항주로 돌아간 엄성은 병을 얻어 이듬해 세상을 떠났는데, 이승과 결별하는 순간 홍대용이 선물한 조선의 먹을 가슴에 품고 그 먹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는 ‘일하제금집(日下題襟集)’에 포함돼 홍대용에게 전달됐다. 이것이 지금 전하는 홍대용의 유일한 초상화로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가 1999년 베이징대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홍대용은 당시 연행에서 엄성을 포함한 세 문재(文才)와 나눴던 필담을 엮어 ‘건정동필담(乾淨동筆談)’을 편찬했다. 그 연행에서 서양 과학에 대한 지식과 식견을 넓힌 것은 물론이다.
베이징 지하철 허핑먼(和平門) 역에서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동서로 뻗어 있는 류리창(琉璃廠·신해혁명 이전 표기는 유리창) 거리를 지난달 29일 찾았다. 이곳은 고서와 고화, 골동품이 많아 서울의 인사동과 같은 곳으로 베이징을 찾는 관광객들이 한 번쯤은 들르는 명소다. 청 건륭 시대에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기 위해 청나라 학자들이 유리기와를 굽던 이 지역으로 모이면서 문향이 흐르는 장소가 됐다.
유리창은 한중 지식인의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세상의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조선의 지식인은 홍대용만이 아니었다. 조선 사절단은 북경에 도착하면 책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이곳에 들렀고, 이에 따라 여러 연행록에 유리창이 나온다.
조선 영조 8년(1732년) 이의현의 ‘임자연행잡록(壬子燕行雜錄)’에 유리창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가지고 간 도장에 관해 청나라 사람과 필담을 나누는데 그가 그 도장이 유리창에서 새긴 것이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홍대용의 눈에도 유리창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지 연행록 ‘연기(燕記)’에 이런 구절을 남겼다. ‘유리창에는 서적과 골동품 등 기물과 잡물이 많고, 상인들 중에는 과거를 보고 관직을 구하려는 남방의 수재가 많다. 이런 까닭에 상점주인 중에는 왕왕 명사가 있다. 거리는 대략 5리 정도다. 길을 걸으면 마치 페르시아의 보배 시장에 들어온 듯 찬란하다. 서점은 7개(17개의 오기)나 있는데 벽 3면에 돌아가며 십수 층의 서가가 달려 있다. 한 서점의 서책만 헤아려도 수만 권이다.’
유리창의 서점을 중심으로 한 한중 지식인의 교유는 이후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으로 이어졌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1778년 북경을 다녀왔다. 유리창의 서점 오류거(五柳居)에서 많은 책을 구입했고, 문헌의 수집과 감별에 일가견이 있던 오류거 주인과 친분을 쌓았다. 당시 유리창 인근에는 많은 중국 문인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덕무와 박제가는 이들을 찾아가 우의를 다졌다. 그중에는 청나라 학자로 10년간 ‘사고전서’ 편집사업 책임자를 맡았던 기윤(1724∼1805)도 있었다. 기윤은 자신의 집이 유리창에서 가깝다며 이들을 집으로 초청했다.
1780년(정조 4년)에는 홍대용의 친구인 박지원이 열하와 북경을 다녀오면서 ‘열하일기’를 남겼다. 박지원이 청 유학자 유세기(兪世琦)와 교우한 곳도 유리창이다. 유리창의 동쪽 끝에 있는 양매죽사가(楊梅竹斜街)에서였다.
1790년(정조 14년) 유득공, 박제가가 북경을 방문했을 때는 유리창 관음각(觀音閣)에 살던 유명 화가 나빙(羅聘)의 거처를 수차례 방문해 친분을 쌓았다. 이에 대한 기록을 유득공은 ‘난양록((난,란)陽錄)’에 남겼는데, 1982년 중국에서는 ‘유리창소지(琉璃廠小志)’를 편찬하면서 난양록에 나온 나빙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유득공은 1801년에도 연행 길에 오르는데 이때 남긴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은 난양록과 함께 중국에서 간행됐으며 중화민국 초기 학자들로부터 ‘당시 청나라의 실정과 폐해를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정확하게 기술한 책’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 허준 ‘동의보감’ 당시 중국서 큰 인기
박 교수는 최근 청 건륭 연간의 ‘건륭경성전도(乾隆京城全圖)’를 이용해 당시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고려관’이 현재 베이징 공안국 건물과 경찰박물관이 있는 곳이라는 것과, 명대에 조선 사신들이 머물렀던 ‘옥하관’이 그 인근에 있는 중국 최고사법기관인 최고인민법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베이징 지하철 츠치커우(磁器口) 근처에 있는 또 다른 ‘고려영’ 자리도 발견했다.
박 교수는 “류리창은 한중 문화 교류의 상징적인 장소였으며 홍대용과 엄성의 교우 관계는 한중 교류사에서 상징으로 삼을 만하다”며 “오늘날 양국 간의 교류도 지식과 문화를 공유하고 함께 발전시킨 양국 지식인의 교유를 지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北京) 시 순이(順義) 구 고려영(高麗營) 진의 인민정부 건물. 간판에 ‘고려(高麗)’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지명 곳곳에 고려영 고리장… 가게이름도 ‘고려’ 흔해
대표적인 곳이 △순이(順義) 구 고려영(高麗營) 진과 소고려영(小高麗營) 촌 △창핑(昌平) 구의 고려하(高麗河) △하이뎬(海淀) 구 고리장(高里掌) 촌 △퉁저우(通州) 구의 대고력장(大高力莊) 촌과 고려사(高麗寺) 등이다.
이 지명들에 남아 있는 ‘고려’는 대부분 ‘고구려’를 뜻한다. 고려(高麗)의 ‘려(麗)’는 중국어로 ‘리’로 읽히기 때문에 이와 발음이 비슷한 ‘력(力)’, ‘리(里)’ 자로 바뀌어 불리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 말 ‘고려’ 명칭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 베이징 북쪽 지역에 있는 순이 구의 고려영 진을 찾았다. 이곳의 중심지에서는 ‘고려’라는 상호가 붙은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족이 대부분인 이곳 주민들 가운데 지명 ‘고려’의 유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청 말 고려영 진에는 상당한 규모의 장이 형성됐는데, 사용하는 도량과 화폐의 단위가 북경 시장과 달랐다. 고려영 시장에서는 북경 시장의 곡물 3두를 1두로 셈했고, 북경의 동전 100전을 600전으로 쳤다. 당시 고려장의 동전은 ‘동전(東錢)’으로 불렀다.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는 “동전은 고구려인 후손이 사용했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한민족이 베이징과 허베이(河北) 성에 촌락을 형성한 경우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당 태종과 고종 시대에 고구려를 침략해 많은 고구려인을 강제 이주시킨 결과다. 순이 고려영 진, 퉁저우 대고력장 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원나라 때 많은 고려인이 지금의 베이징과 그 주변에 들어와 정착한 것이다. 셋째는 청나라 때 많은 조선인이 만주족 팔기군에 편입돼 허베이 지역으로 들어와 정착했다. 예컨대 허베이 성 칭룽(靑龍) 현에 있는 박씨 집성촌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명과 관련한 구체적 기록이 없어 그 연원을 찾는 데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베이징=글·사진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