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논설위원
손학규가 되면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묻지마 단일화 같은 문재인식 정치공학은 없을 것 같다. 그는 ‘안철수 현상’이 정치 불신에서 나타났다고 봤다. “안철수에게는 사회적 백신 역할을 맡기고 민주당은 그런 사람 열 명 만들어 혁신 성장해야 한다”는 말에선 정치인다운 자존심도 보인다. 새누리당은 싫고 친노(친노무현) 부활은 무섭고 안철수는 미덥지 못하다는 사람들에게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들고 나온 손학규는 매혹적일 수 있다.
세계에 부는 정권교체 바람도 손학규한테 불리하지 않다. 지난해 전 세계 선거에서 경제가 시원찮은 나라의 집권당은 전패했다. 올해는 70여 개국에서 선거가 치러지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의 주요 국가들은 지금까지 대만을 빼고는 모두 지도자가 갈렸다.
뉴욕타임스는 “재정위기의 유럽은 지금 긴축재정과 구조개혁을 찬성하는 쪽과 둘 다 반대하는 쪽으로 분열돼 있다”며 “진보좌파라면 긴축재정은 풀되 구조개혁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 그러면 유럽이 자랑하는 복지국가는커녕 위기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게 냉정한 경제현실이다.
근육보다 좌파 이념이 울퉁불퉁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심금을 울리는 슬로건을 내건 손학규는 그래서 진보로 봐주기 어렵다. 21세기형 진보적 자유주의자를 자처하고 민주당 주류보다는 중도에 있다 해도, 구조개혁을 말하지 않는 진보는 수구좌파일 뿐이다. ‘유럽의 환자’였던 독일이 오늘날 유럽연합(EU)의 목줄을 쥔 경쟁력 있는 나라가 된 것도 2000년대 중반 사민당 정부의 노동과 생산시장 개혁 덕분이었다.
그가 쓴 ‘저녁이 있는 삶-민생경제론’에는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이 절절히 강조됐을 뿐, 해법은 좌파가 늘 말해온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1년 분당 선거에선 무상급식의 ‘무’자도 꺼내지 않는 온건 강남좌파의 이미지로 성공했음에도 싸이의 ‘강남스타일’처럼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가 돼버렸나 싶다.
양극화와 빈곤이 심각해진 구조적 이유가 저임금 비정규직과 서비스직 확대 때문인 건 틀림없다. 그래도 ‘정규직 전환’은 21세기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청년세대 취업이 더 어려워져서다. 특히 공공부문부터 전환했다간 국민은 신(新)특권계급의 봉급에 연금까지 대주느라 등골이 빠질 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두 달 전 내놓은 ‘한국의 사회통합 증진’ 보고서의 제안도 정규직 전환이 아니라 정규직의 노동보호 축소와 비정규직의 사회보험, 근무연한, 직종 확대였다.
손학규도 책에는 “네덜란드에 1990년대부터 시간제 근로를 촉진하고 보호하는 정책이 제도화됐다”고 썼다. 그러고도 일자리 잡아먹는 거꾸로 정책을 공약한 꼴이다. 일자리를 키워낼 정책으로 꼽히는 탈규제에 대해선 한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보수꼴통도 복지의 중요성을 외면할 강심장은 없다. 그가 책에 썼듯 성장에 도움되는 복지가 절실한 때다. 이걸 내다본 스웨덴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반 보편적 복지에서 근로를 전제로 한 사회보장급부로 여러 차례 칼질을 했다.
그런 민생경제론 날 저물 수 있다
다행히 그는 “서민과 중산층을 살려야 한다는 민생경제론의 방향에서 타협은 있을 수 없다”면서도 “그 방법에서는 유능한 타협가가 되는 길에서 흔들리지 않겠다”고 했다. 서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오히려 그들을 금치산자로 묶어두는 식의 수구좌파 정책은 이미 신물 나게 겪은 바다.
강남스타일이든 대구스타일이든 ‘커피 식기도 전에 원샷 때리고’ ‘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기질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걸 살려내 올림픽 축구팀처럼 불타오르게 만들 진짜 정치 리더를 보고 싶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