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朴殷植)은 의병(義兵) 정신이 한민족의 특성이라고 믿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기질, 침략자에 맞서 일어나는 저항의식이 우리 역사에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의병 수가 관군을 능가했다. 의병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양반부터 천민까지 다양하게 참여했다. 박은식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라며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병은 때로 눈부신 전적을 올리기도 했으나 한계도 뚜렷했다.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군은 전술전략이나 지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관군과 대립하거나 내부에서 의견 충돌이 빚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구한말의 의병들은 세계를 내다보는 눈이 부족했고 반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이념을 추종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의병 활동이 활발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라꼴이 엉망이어서 정규 군대가 제 몫을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의병 정신이 기괴하게 왜곡된 형태로 사이버공간에서 표출되고 있다고 하면 선열을 너무 모독하는 일이 될까. 한국 누리꾼들이 집요한 추적 끝에 런던 올림픽 여자 펜싱 에페 준결승전에서 신아람 선수를 패배하게 만든 오스트리아 심판의 ‘신상’을 털었다. 누리꾼들은 신아람의 상대 선수였던 브리타 하이데만(독일)의 페이스북을 공격하고 그의 누드 사진을 뿌렸다. 딴에는 그게 ‘불의에 맞서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한체육회와 같은 무능한 공적 조직을 대신해 자신들이 사적인 응징을 가해야 한다고 여긴 듯하다.
▷한국 누리꾼들의 정의감은 너무 충만하다. 아이돌 그룹 멤버가 ‘왕따’를 당한 정황이 보였다고 그 그룹 전체를 왕따시켜 버렸다. 다른 멤버의 신상을 털고 외모를 비하하며 극악하게 비난한다. 피해자로 지목된 멤버가 “그만해 달라”고 호소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몇 년 전 어느 남녀 영화배우가 결혼할 때에는 ‘반대 서명운동’까지 벌어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불륜으로 시작됐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기질이라고 보기엔 한없이 가볍고 유치하다. 팩트(사실)를 존중하자는 목소리는 묻히기 십상이다. 억눌린 공격성이 ‘정의감’의 너울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장강명 산업부 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