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
이를 보다 못한 마을 어른이 하루는 남자에게 점잖게 충고했다.
“이보게, 자넨 어째 물이 새는 물동이로 물을 긷는가. 이제 그만 그 물동이는 버릴 때가 되었네.”
“아닙니다. 이 물동이는 물이 새지만 아주 소중합니다. 저길 한번 보십시오. 제가 물지게를 지고 온 길 왼쪽엔 항상 꽃과 풀들이 자라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기 오른쪽 땅은 먼지가 폴폴 일고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물동이가 금이 가 물이 새지만, 그 물이 메마른 땅을 적셔 풀꽃을 자라게 하니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금이 가 물이 새는 물동이는 물 긷는 물동이로서는 이미 그 가치가 상실된 존재다. 계속 물을 길으려면 물이 새는 물동이는 버리고 새 물동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물동이 주인은 그런 물동이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고 버리지 않는다.
이는 물 긷는 물동이가 물이 새면 더는 쓸모가 없으므로 버려야 한다는 평균적 가치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만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일 더이상 물 긷는 데 가치가 없다고 물이 새는 물동이를 버렸다면 길가에 아름다운 풀꽃들은 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물이 새는 물동이의 숨은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꽃을 피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숨은 가치 발견할때 세상 아름다워
내 인생의 물동이도 금 간 물동이다. 세상이라는 우물가에 가서 물을 가득 긷고 집에 와보면 언제 물이 샜는지 물동이에 물이 반도 차 있지 않다. 애써 금 간 곳을 때우고 물을 길어도 그때뿐이다. 그래도 나는 내 물동이를 버리지 않는다. 물이 뚝뚝 샌다 할지라도 어디 좋은 데 쓰일 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우화의 물동이처럼 언젠가는 세상의 마른 길가에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축 처진 어깨에 힘이 솟는다.
19대 국회의원이 된 도종환 시인의 의원회관으로 ‘근조’ 리본이 달린 화분이 전달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잡지에 그가 쓴 글에서 읽고 나는 이 ‘물 새는 물동이’ 우화가 떠올랐다. 그의 글에 따르면 “평소 가까이 지내던 분이 내가 국회에 들어와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땅에 아까운 시인 하나 죽었다’라며 흰 천에 검은 글씨로 ‘근조’라고 쓴 화분을 보냈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이 근조 화분을 보낼 만큼 도종환 시인을 염려하고 사랑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지니면서, 그 또한 시인에 대한 평균적 가치관에 고형화돼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물 새는 물동이로는 더이상 물을 긷지 말라고 충고한 우화 속의 마을 노인을 연상시킨다.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면 시를 못 쓴다. 따라서 시인으로서는 죽음을 맞이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평균적 가치관이다. 그는 그런 가치관만이 진정한 가치라는 신념하에 도종환 시인에게 근조 화분까지 보내는 행동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연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면 시를 쓸 수 없는 것인가. 아니다. 시인은 국회의장이 되어도, 대통령이 되어도 시를 쓸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인 자신의 영혼의 문제지 평균적 가치관에 의존할 문제가 아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 글에서 “나는 그 화분을 책상 옆에 내려놓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분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나는 이미 죽은 건지도 모릅니다. 시 쓰는 사람이 혼탁한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그 자체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평균적 가치관으론 세상 못바꿔
나는 도종환 시인이 근조 화분에 물을 주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까 이제 시를 못 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길 바란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이나 되고 난 뒤나, 또 국회의원을 그만둔 뒤에도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에게 시인으로서의 죽음은 없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든 근조 화분을 받을 까닭이 없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