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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도발적 원작과 혈기방장한 연출의 상승효과

입력 | 2012-08-14 03:00:00

연극 ‘뜨거운 바다’ ★★★★



일본 현대연극의 대부로 불리는 쓰카 고헤이의 파격적 연극문법과 한국 연출가 고선웅의 강렬한 대중적 흡인력, 그리고 그 둘의 만남이 일으킨 스파크에 감전된 듯 젊은 배우들의 폭발적 연기가 불을 뿜는 연극 ‘뜨거운 바다’. 이다엔터테인먼트 제공


일본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양심적 지식인들의 좌장 격인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90)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 일본사상사를 지배한 키워드로 각각 ‘전향’과 ‘대중문화’를 꼽았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까지 ‘15년 전쟁’ 기간에 엘리트 지식인의 사상적 방황이 중요했다면 전후 일본에선 만화, 만담, 프로레슬링, 영화, TV 드라마, 대중가요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다는 통찰이다.

‘일본 현대연극은 쓰카 이전과 쓰카 이후로 나뉜다’는 찬사를 받았던 재일교포 2세 극작가이자 연출가 쓰카 고헤이(한국명 김봉웅)의 대표작을 극화한 연극 ‘뜨거운 바다’는 이런 통찰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품이다. 만화나 만담에나 등장할 만한 과장된 캐릭터,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한껏 극대화한 대사, 음악, 연기의 3박자 조합이 초래하는 자기희화화, 스릴러 멜로 에로 추리 액션 코믹 등 온갖 장르가 범벅된 스타일의 유희….

사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수사반장’에나 어울릴 법하다. 도쿄 경시청 소속 형사 셋이서 아타미 해변에서 발생한 여공의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현장에서 체포된 오야마 긴타로(마광현)를 심문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는 것이다. 거기엔 시골소년의 순박한 첫사랑, 타인의 삶에 무감각한 도시생활에서 상처받는 소외계층의 눈물, 돈에 쫓겨 밑바닥까지 추락한 영혼의 소리 없는 절규가 담겨있다.

하지만 연극은 이야기가 이런 통속적 결론으로 치닫도록 놔두지 않는다. 럭비공처럼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튀기 일쑤다.

비장미 가득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도쿄 경시청의 엘리트 부장형사 기무라 덴베(이명행)는 사건해결보다는 다음 날 시집가는 부하 여형사 미즈노 도모코(이경미)를 놓치기 싫어 갖가지 기행을 펼친다. 기무라를 좋아했지만 남녀관계에 있어선 한없이 우유부단한 그에게 복수하는 심정으로 딴 남자에게 시집가는 미즈노 역시 염불(살인사건 수사)보단 잿밥(사랑의 추억)에 더 취해있다.

경찰청장의 딸과 사귀면서 도쿄 경시청으로 전격 발탁된 시골형사 구마다 도메기치(김동원)만이 사건해결의 의욕에 불탄다. 하지만 기무라는 구마다의 아픈 가족사를 들추며 끊임없이 그를 출세욕에 물든 속물로 몰아붙인다. 이렇게 툭하면 티격태격 다투는 형사들을 견디다 못해 용의자인 오야마가 진지한 수사를 호소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4명의 등장인물은 마치 인생사에 통달한 듯 허세와 위악을 부리기 바쁘다. 증거조작과 허풍, 협박, 언론플레이를 아무렇지 않게 해치우며 상대의 뒤통수를 치지 못해 안달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사소한 아픔 앞에서는 한 줌의 위엄이나 체면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자기연민의 화신들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이런 입체적 연극성에서 발생한다. 무대를 집어삼킬 듯한 에너지로 타인에겐 거침없는 독설을 쏟아부으면서 자기방어를 위해선 치졸하기 그지없는 배우들의 모습은 폭소를 유발한다. 하지만 연극이 끝날 무렵이 되면 타인에겐 결코 곁을 내주지 못하면서 자기 안의 우물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의 고독이 물밀 듯이 밀려든다.

이 작품의 원작인 ‘아타미 살인사건’이 쓰카가 25세 때인 1973년에 발표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후 일본인에게 익숙한 대중문화의 문법으로 중무장한 이 일본 연극계의 이단아는 파격적 캐릭터와 스타일로 승부를 걸면서 요란하게 변죽을 울리는 듯하다가 당시 일본인들이 감추고 싶은 속살을 깊이 헤집고 들어간 것이다.

사실주의 연기의 전통이 강한 한국 연극계에서 이 작품의 진가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온갖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은 혈기방장한 연출가 고선웅을 만나면서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이는 것이 느껴졌다.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이명행과 이경미 등 젊은 배우들의 감전된 듯한 무대 연기도 강렬했다.

요코우치 겐스케, 히라타 오리자, 사카테 요지 등 일본연극의 등뼈가 되고 있는 중견 연극인들이 2010년 62세로 타계한 쓰카를 왜 그토록 추모하는지를 이해시켜준 무대였다.

: : i : : 19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 극장 대극장. 3만∼7만 원. 02-3668-0007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