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개비, 노루오줌, 노랑물봉선, 긴산꼬리풀, 꿀풀, 동자꽃, 두메고들빼기, 둥근이질풀, 말나리, 모싯대, 엉겅퀴, 잔대, 층층이꽃, 큰까치수염, 큰뱀무, 터리풀, 패랭이꽃, 하늘나리… 소꿉친구들 다 모였네
함백산 만항재 풀꽃세상. 온갖 나비들이 자줏빛 머리의 엉겅퀴 통꽃을 어지럽게 탐하고 있다. 엉겅퀴는 ‘피를 잘 엉기게 한다’는 데서 붙은 이름. 보통 ‘가시나물’이라고 부른다. ‘들꽃이거든 엉겅퀴이리라/꽃 핀 내 가슴 들여다보라/수없이 밟히고 베인 자리마다/돋은 가시를 보리라/하나의 꽃이 사랑이기까지/하나의 사랑이 꽃이기까지’(복효근의 ‘엉겅퀴의 노래’). 만항재의 여름 들꽃은 이제 끝물이다. 이미 한쪽에선 가을 들꽃 쑥부쟁이가 우우우 기지개를 켠다. 등황색 수풀떠들썩팔랑나비가 풀썩거리며 호들갑을 떤다. 꿀벌이 잉잉거리다가 꽃술에 코를 처박고 정신없이 꿀을 빤다. 함백산 만항재=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권달웅 ‘들꽃이름’에서
강원 정선군 만항재에 들꽃세상이 열렸다. 만항재(1330m)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다. 지리산 정령치(1172m)나 강원 평창∼홍천의 운두령(1089m)보다 높다. 태백시, 정선군 고한읍, 영월군 상동읍이 만나는 삼거리고갯마루다. 그 바람 드센 산자락(3만여 평)이 온통 들꽃 천지다.
긴산꼬리풀, 꿀풀, 노랑물봉선, 달개비, 동자꽃, 노루오줌, 두메고들빼기, 둥근이질풀, 말나리, 며느리밑씻개, 모싯대, 엉겅퀴, 잔대, 당귀, 층층이꽃, 큰까치수염, 큰뱀무, 터리풀, 패랭이꽃, 하늘나리….
요즘은 단연 둥근이질풀과 노루오줌, 동자꽃 세상이다. 둥근이질풀은 5장 분홍꽃잎에 진홍잎맥이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젖먹이 살갗에 돋은 푸른 정맥 같다. 잎 끝이 약간 둥근 데다 ‘설사 이질’에 좋아 둥근이질풀이다. 노루오줌은 뿌리에서 노루오줌 냄새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분홍 원뿔꽃이 난쟁이나라 ‘꼬마 크리스마스트리’ 비슷하다. 풀밭 곳곳에 연한 불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약간 밋밋하고 까칠하다.
노란 마타리꽃과 하얀 당귀꽃은 껑충 키가 크다.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어 소박한 ‘우산 꽃’을 펼친다. 보랏빛 엉겅퀴꽃도 드문드문 훤칠하다. 보라 낙지머리에 나비가 너울거리며 정신없이 꿀을 빤다. 노란 두메고들빼기꽃은 한들한들 한가롭다. 주황꽃잎에 깨점박이 말나리, 하늘나리, 참나리는 트럼펫이다. 금방이라도 재즈가 흐느껴 나올 것 같다. 꽃이 하늘을 향하면 하늘나리, 옆을 바라보면 중나리나 말나리, 아래쪽을 굽어보면 참나리다.
노란 달맞이꽃과 하얀 개망초꽃은 동네 주먹들처럼 풀밭 주위를 감싸고 있다. 우두둑 손가락을 꺾으며 팔짱을 낀 채 눈을 부라린다. 먼지떨이처럼 머리가 부스스 하얀 터리풀꽃도 눈자위를 희번덕거리며 으스댄다.
풀꽃은 역시 앉은뱅이꽃들이 깜찍하다. 서 있으면 보이지 앉는다. 허리를 굽혀 발아래를 보아야 한다. 낮게 앉아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자세히 보아야/예쁘다.//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푸른 달개비꽃(닭의장풀)은 풀섶에 숨어 있다. 앙증맞다. 노란 뱀딸기꽃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빙긋이 웃는다. 방아잎 원통꽃은 보랏빛 핫도그처럼 오종종 모여서 종주먹을 들이댄다. 노란 물봉선이 수줍은 듯 풀섶 한 모서리에 숨어 있다. 초롱 모양의 푸른 잔대와 모싯대꽃에서는 딸랑딸랑 요령 소리가 들린다.
만항재에서는 철따라 200여 종이나 되는 풀꽃이 피고 진다. 여름에 피는 것만 60여 종. 지금이 막바지 끝물이다. 찬바람이 불면 쑥부쟁이 구절초 감국 등 가을풀꽃들이 우우우 기지개를 켠다. 아침저녁 물안개에 젖은 만항재 풀꽃은 신비하고, 몽환적이다. 한낮엔 벌 나비 잠자리가 끊임없이 오고간다. 꿀벌 잉잉대는 소리, 꽃등에 붕붕 나는 소리, 고추잠자리 빙빙대는 소리 가득하다. 찌르르∼찌르르∼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저릿하다.
풀꽃은 산과 들이 좋아 그곳에서 산다. 예쁘다고 그것을 캐다가 온실에 가져다 심으면 시름시름 죽는다. 제발 내버려 두어라. 이름이 없으면 어떤가. 뭐라 부른들 또 어떠한가. 누가 밟고 가도 괜찮다. 짓뭉개지면 다시 옆으로 누워 피어난다. 꺾어가도 끄떡없다. 열배 백배 다시 피어난다. 그저 내버려 두면 된다. 들꽃은 자유다. ‘자기 이유대로’ 살 뿐이다.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을/들꽃언덕에서 알았다.’
-유안진 ‘들꽃언덕에서’
○ 석탄 운반길… 아라리∼ 아라리∼ 꽃구름길 넘어간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영감은 할멈 치고 할멈은 아 치고/아는 개 치고 개는 꼬리치고/꼬리는 마당 치고/마당가역에 수양버들은 바람을 휘몰아치는데/우리 집의 저 멍텅구리는 낮잠만 자네’
석탄 운반길 옆 산기슭의 옛 석탄 채굴 흔적.
운탄길은 1980년대 말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이후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 됐다. 사람들도 하나둘 떠났다. 오직 나무와 풀만이 그곳에 뿌리를 박고 다시 생명의 씨앗을 뿌렸다. 이제 검은 먼지 풀풀 나던 운탄길은 보물길이 됐다. 검은 흙길은 비와 바람에 씻기고, 풀들이 돋아 ‘푸른 하늘길’이 됐다. 온갖 야생화가 피고 진다.
만항재(1330m)∼하이원골프장(1340m)에 이르는 20리(약 8km) 운탄길은 풀꽃천지다. 표고차가 10m밖에 되지 않는 고즈넉한 길이다. 길 아래 수많은 봉우리가 첩첩으로 눈에 겹친다. 길섶엔 온갖 야생화가 피고 진다. 한마디로 꽃구름길이다.
운탄길은 구불구불하다. 구렁이가 햇볕을 늘어지게 쬔 뒤, 느릿느릿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도 ‘아라리∼아라리∼’ 뱅뱅 돌아 그 자리이다.
화절령∼만항재 운탄길(20km)은 해발 1200m가 넘는다. 백운산 함백산 어깻죽지를 지르밟고 간다. 느릿느릿 걸어도 6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이원 카지노, 하이원 콘도, 하이원 골프장을 끼고 빙 돌아간다. 새벽안개가 자욱할 때 걸어야 제맛이다. 안개가 발아래 골짜기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화절령(花折嶺)은 ‘꽃을 꺾는 고개’이다. 이름이 꽃처럼 예쁘다. 꽃나무 가지가 꺾일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화절령 삼거리 부근엔 도롱이와 아롱이 연못이 있다. 산 밑 석탄갱이 무너져 생긴 습지이다. 지름이 얼추 80∼100m쯤 될까. 산 아래 땅이 꺼지자, 위쪽 땅도 움푹 들어가 연못이 된 것이다. 당시 거기에 살던 키 큰 나무들도 뿌리가 들떠서 죽었다. 죽은 나무들은 병풍처럼 서 있거나, 늪 속에 그대로 누워 있다. 오래된 흑백사진이다.
도롱이 아롱이 연못엔 도롱뇽이 산다. 새벽이나 늦은 밤엔 노루 멧돼지 사슴이 목을 축이고 간다. 옛날엔 광원 부인들이 이곳에 와서 남편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도롱뇽이 많이 보이면 길조로 여겼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날엔 애간장을 태웠다.
○ 지프 와이어… 지옥에서 천당으로
325.5m의 높이에서 시속 70km의 속도로 하강하는 지프 와이어.
그 위쪽에선 지프 와이어를 즐길 수도 있다. 군대 유격훈련 경험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신종 익스트림 레포츠라고 할 수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를 쇠줄로 이어서 도르래로 ‘허공을 미끄럼 타듯’ 내려간다. 325.5m의 높이에서 시속 70km의 빠르기로 순식간에 하강한다. 길이 1.1km. 한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짜릿, 아찔하지만 스릴 만점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