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정치부장
언제부턴가 특정 브랜드 소주는 안 마신다는 이들을 적지 않게 봐왔다. 주로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소주 브랜드의 서체가 골수 좌파학자의 작품이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또 어느 때부턴가 진보좌파 쪽 사람 중에서도 이 소주를 마시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 소주를 만드는 주류회사가 속한 그룹이 ‘서민 자영업자의 등골을 빼먹는’ 대형마트 사업을 하기 때문이라나.
자신과 이념이 다른 학자가 붓글씨를 썼다고, 소주를 만든 회사도 아니고 그룹이 맘에 안 든다고 몇천 원짜리 소주까지 ‘NO’해야 하나. 이념이 다른 상대를 적대시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거부하는 끝 모를 증오심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와 다른 생각을 일정부분 용인하는 톨레랑스(tolerance·관용)의 결여는 한국사회가 벗어던져야 할 천격(賤格)의 산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반대진영의 것이라면 젓가락 한 짝까지도 배척하는 진영논리에 기름을 붓는 게 음모론이다. 앞서 말한 소주도 한 병 팔릴 때마다 좌파학자가 로열티를 받고, 그 돈이 좌파운동권의 자금줄이 되고 있다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돌았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학자는 주류회사에서 한번에 받은 돈을 모두 자신이 봉직하던 대학교에 기부했다.
이런 얘길 하면서도 살짝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내가 그 소주회사와 무슨 연줄이 통한다는 근거 없는 음모론이 나올까봐. 이따위 걱정까지 해야 할 정도로 우리 사회 바닥까지 삼류 음모론에 축축이 젖어있는 게 현실이다.
사실 음모론은 자기보호 심리에서 나온다. 학창 시절 매일 학과가 끝나면 공부 못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나 보러 다니고 과외도 안 하는데, 시험 때면 벼락치기로 공부해 1등을 놓치지 않는 ‘엄친아’가 있었다면…. “알고 봤더니 매일 밤을 새운다더라” “비밀과외를 받는다더라”는 음모론이 돌았을 법도 하다. 이는 열등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보호 메커니즘의 일종이다.
대통령선거를 4개월 앞둔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 음모론 천국이다. 이런저런 모임에 가보면 대선 기사를 다루는 나도 처음 들어보는 기기묘묘한 음모론이 난무한다. 음모론은 대개 약자의 전유물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최근 동아일보가 4·11총선 공천헌금 의혹을 특종 보도(2일자 1면)하자 친박계 내에선 ‘박근혜를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친이명박계의 기획’이란 음모론이 흘러나왔다. 야권에서도 ‘보수신문인 동아일보가 왜 박근혜에게 불리한 기사를 내질렀을까’를 두고 가당찮은 ‘소설’들이 난무했다. 국익에 심각한 침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걸리면 쓰는’ 언론의 생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들이다.
12월 대선은 또 다른 복수전의 출발?
음모론은 시간이 지나면 누추한 본색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음모론을 착안하는 기발한 머리를 다른 데 쓰면 좋으련만, 막아도 막아도 스며드는 유독가스처럼 번지는 게 작금의 음모론이다. 이는 음모론이든, 뭐든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는 승리지상주의 탓이다. 이런 행태는 노골적으로 편을 가르고, ‘3대 의혹사건’을 제기해 2002년 대선에 승리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성공신화 이후 더 심해졌다.
이제 우리도 승리가 중요하지만, 어떤 승리인지 따져봐야 할 때가 됐다. 벌써부터 12월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든, 또 다른 ‘복수전’의 출발점이 될 거란 우려가 나온다. 하기야 대선 승리에만 혈안이 돼 있는 이들에게 이런 얘기는 귀에 안 들어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