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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칼럼/김지혜]‘사전 피임약’의 불편한 진실

입력 | 2012-08-17 03:00:00


김지혜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여자 대학 동기가 산부인과에 들어가는 걸 봤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대한민국의 평범한 20대 남자 스무 명에게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마치 짠 것처럼 같았다. “사고 친 거지.” “함부로 몸 굴렸구나.” “낙태하러 간 거 아냐?” 남자들의 인식이 어쩜 그리 저급할 수 있는지 실망스러운가. 속상하지만 현실이다. ‘산부인과=임신’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내 친구는 대학 1학년 때의 경험을 7년이 지난 지금도 악몽처럼 기억한다. 가슴에 응어리가 잡혀 산부인과를 찾았다. 항상 같이 다니던 남자친구도 함께 갔다. 병원엔 임산부와 중년 여성들이 많았다. 남자친구와 자신에게 쏟아지던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간호사가 물었다. “성경험 있어요?” 친구는 그 길로 병원을 도망치듯 나왔다고 했다. 그 뒤로 그녀는 집과 멀리 떨어진 곳의 산부인과를 전전하며 가슴의 혹을 치료했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생리통으로 산부인과를 찾았다. 서류에 마지막 생리일을 썼다. 불규칙한 주기를 보더니 간호사는 종이컵을 내밀었다. 임신 여부를 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생리통 때문에 왔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순서를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를 관객으로 두고 본의 아니게 임신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 뒤로 생리통으로 병원을 찾지 않는다. 주위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임신이라는 연결고리를 감수하며 산부인과를 가고 싶지 않아서다.

20대에게 산부인과는 아직 어렵다. 그런데 식품의약품안전청은 6월 “호르몬 수치에 영향을 미치고, 혈전증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이유로 사전(事前) 피임약을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바꾸는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안대로 확정되면 약국에서 살 수 있던 사전피임약을 사려면 앞으로는 산부인과에 가서 처방을 받아야 한다. 과연 사전피임약을 처방받기 위해 임신과 낙태라는 편견을 등에 업고 산부인과로 당당하게 발걸음 하는 미혼 여성이 몇이나 될까. “제도 바뀌기 전에 몇 통 미리 사둬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취재 삼아 서울 종로구의 한 산부인과를 찾아 사전피임약 처방을 요구했다. 병원에서 처방을 받으면 약에 대해 얼마나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식약청과 산부인과 업계의 주장대로 지난 40년간 약국에서 판매된 사전피임약이 부작용이 심각한지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따로 몸 상태를 체크하지 않았고 ‘원하면 처방해준다’고 했다. “복용법 보고 먹으면 된다”며 약에 대해 별다른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사전 피임약이 전문의약품이 돼야 한다는 식약청 주장의 근거에는 여성의 건강에 대한 염려가 깔려있지만 이보다는 실질적인 성교육을 통한 의식 전환이 먼저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피임은 여성의 권리이지만, 아직 음지의 영역이다. 이는 무엇보다 잘못된 성교육 탓이라고 본다. “고등학교 가정선생님이 혼전 순결을 강조하셨다” “결혼 전 성관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교육받았다”는 친구들이 많다. 지금의 20대는 학창시절 성교육에서 피임 문제를 드러내도록 교육받지 못했다. 오히려 혼전 피임을 쉬쉬하도록 배웠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당당하게 산부인과에 가서 피임약을 처방받고 상담하라는 것은 억지스럽다.

사회적 통념과 편견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산부인과를 출입하는 20대 여성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은 꽤나 뿌리 깊다. 편견 따위는 깨고 사전피임약 처방을 받으러 산부인과로 진군하라고 여성 개인에게 요구하지 말자. 무엇이 더 현실적으로 여성에게 피임의 자유와 건강을 증진시키는 방법인지 생각해 볼 시점이다.

김지혜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