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나는 사복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원효 스님이 했다는 법문을 명문으로 느낍니다. “태어나지 마라, 죽는 게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게 괴롭다.”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으니 삶과 죽음은 붙어 있는 거지요?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습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던 날의 대화록입니다. 독배를 마셔야 했던 그날 아침, 옥리가 들어와 소크라테스 발목을 옥죄던 사슬을 풀어 줍니다. 사슬이 풀리는 날이라는 건 죽음의 날이라는 의미지요?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소크라테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제자들 앞에서 사슬이 풀려 시원해진 발목만 응시하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쾌락이란 이상한 거야. 고통과 대립하는 것일 텐데,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쾌감이 생기는구먼.”
“잠자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의 반대인 것처럼 살아있는 것의 반대는 없을까?”
“죽음입니다.”
살았기 때문에 죽는 거지요? 죽음은 삶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렇다면 삶은 죽음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겠느냐고 소크라테스가 조심스럽게 되묻는 겁니다.
생과 사는, 천국과 지옥처럼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에 기대어 있습니다. 어둠을 모르고 빛을 알 수 없고, 지옥을 통과하지 않고 천국에 이르는 길이 없듯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알겠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소크라테스가 왜 그렇게 평화로웠는지. 그는 죽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파이돈은 그날의 소크라테스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말씀이나 몸가짐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참으로 두려움이 없고 고귀한 최후였습니다.”
‘내 묘지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난 잠들어 있지 않습니다. 난 천 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빛이 되고, 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피어나는 꽃 속에 있습니다. 나는 곡식 익어 가는 들판이고, 당신의 하늘을 맴도는 새…, 내 묘지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