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 로맨스의 SM판” “알파걸도 외롭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기록제조기’다. 각국에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가 세운 판매 기록을 무섭게 갈아 치우고 있다. 시공사 제공
서점에서 여성들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살펴보고 있다. 시공사 제공
《 올 상반기 영미권 출판시장을 강타한 영국 여성 작가 E L 제임스(49·사진)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시공사) 열풍이 국내에서도 불고 있다. 시공사에 따르면 7일 첫 출간 이후 2주 만에 총 16만 부(1∼4권 합계)가 판매됐다. 종이책은 15만 부, 전자책은 1만 부가 나갔으며 구입자의 73%가 여성이었다. ‘엄마들을 위한 포르노’란 책의 수식어를 입증하듯 구입자의 76.4%가 30, 40대였다. 대학 졸업반인 스물한 살 아나스타샤 스틸과 스물일곱 청년 재벌 크리스천 그레이의 도발적, 변태적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4월 출간 이후 세계적으로 400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37개국과 판권 계약을 마쳐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문학성은 고사하고 기존 로맨스 소설과 차별성 없이 성적 표현 수위만 높인 ‘로맨틱 포르노’라는 시각도 있다. 남녀 독자 간의 ‘온도차’도 확연하다. 본보는 성을 다룬 작품을 쓰거나 대중문화 풍향에 예민한 전문가 6명에게 1, 2권을 보낸 뒤 평을 들어봤다. 20, 30대 여성 팬층이 두터운 소설가 백영옥, 문화일
보에 색(色) 짙은 소설 ‘유혹’을 연재했던 소설가 권지예, 연애 드라마 전문가인 대중문화평론가 신주진(이상 여성), 섹스 소설집 ‘남의 속도 모르면서’에 참가한 소설가 김도언, 남성잡지 ‘GQ’에 솔직, 발칙한 섹스칼럼을 연재했던 이우성 시인,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정동훈 교수(이상 남성)다. 이들의 솔직한 서평을 전한다. 》
▼ 완벽한 남자의 강력한 수컷성이 여심 자극 ▼
○ 백영옥 소설가 “로맨스 소설 자체를 좋아하는데… 유치하고 좋았다. 하하. 하이틴 로맨스의 SM(사디즘+마조히즘)판. ‘아나’가 ‘그레이’를 보면서 ‘저렇게 잘생기면 법에 걸리지 않나’라고 하는 부분 등에서 빵빵 터진다. 트라우마가 있는 남자가 자기로 인해 구원받는다는 여성들의 판타지를 잘 집어냈다. 돈도 많고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가 강력한 수컷성을 스트레이트로 팍팍 보여주는데 무시할 여자가 있겠나. 처녀인 아나가 SM에 빠지는 과정을 보여줘 남성의 판타지를 자극하기도 한다. 영리한 작품.”
▼ 여성의 호기심은 철저히 충족시키지만… ▼
○ 권지예 소설가
“아나가 ‘그레이 멋져’ ‘끝내줘’ 등 노골적인 찬사만 한다. 읽고 난 뒤 대단하게 떠오르는 게 없다. 몇 번 섹스의 강도를 높인 것밖에는. 일부에서는 ‘성애 소설의 바이블’이라고 하는데 순 ‘뻥’ 같다. 우리나라 여성은 달콤하고 포장된 러브스토리를 좋아하지 이런 하드코어적인 것을 좋아할까 싶다. 다만 기존 ‘섹스 소설’들이 남성 관점이었던 것에 비해 이 책은 철저히 여성을 위한 거다. 여성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재미는 있을 것 같다.”
▼ 술술 읽히는 로맨스물… 포르노론 별로 ▼
○ 신주진 대중문화평론가
“포르노적인 측면이 있지만 포르노로 치면 ‘재미가 없는 것’이다. 로맨스물의 일종으로 술술 읽히는 통속 소설. 전형적인 신데렐라 얘기고, 왕자가 재벌남으로 변했다. 신데렐라 구조는 지배와 저항의 관계인데 이 소설에서는 SM 관계로 나왔다. 섹스를 알아가는 섹스모험물, 판타지가 가미됐다. 아나가 느끼는 SM에 대한 공포는 스릴러적인 요소가 있어 끊임없는 긴장감을 준다. 하지만 딱히 새롭지는 않고, 대형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힘은 찾지 못했다.”
▼ 외설적이면서도 난삽하지 않고 달콤 ▼
○ 김도언 소설가
“작가는 성행위 자체를 매우 디테일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는 재주가 있다. 외설적이면서도 난삽하지 않고 달콤하게 그려냈다. 이 소설의 특별한 매력이다. 남자들과의 지위 경쟁, 생존 경쟁을 벌이느라 피폐해진 여성들의 무의식을 위로하는 전형적인 판타지 서사다. 아무리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진화해도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영원불변인 듯. 알고 보면 알파걸도 기대고 싶고 외로운 거다. 여자들의 셈속을 알고자 하는 남자들이 너도 나도 따라 읽으면서 ‘슈퍼-빅셀러’가 된 게 아니겠나. 체면을 벗어던진 ‘응접실 소설’(19세기 연애소설)의 21세기 버전이라고 해야 하겠다.”
▼ 21세기 여성이 이런 상투적인 것에 열광? ▼
○ 정동훈 광운대 교수
“투표권을 쟁취하고 남녀평등을 위해 싸워왔던 21세기 여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고전적이고 상투적인 이야기에 사로잡힐 수 있었을까. 화려하고 디테일한 성관계의 묘사보다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그레이와 사랑에 빠져 버린 아나의 순수한 사랑과 너무나도 완벽한 그레이의 존재 자체가 답일지도 모르겠다. 여성 독자들은 아나의 눈으로 그레이의 숨 막히는 몸을 훑고, 섹스를 나누고, e메일로 대화를 나눈다. 아나는 무감각해지고 반복적인 일상의 독자들에게 생기 있는 활력을 불어넣어 줬고, 새로운 사랑에 눈뜨게 했다.”
▼ 사실적인 욕망에 대한 소심한 분출 ▼
○ 이우성 시인 겸 섹스칼럼니스트
“‘성적으로 왕성하다’는 표현은 관습적으로 남자에게 쓰인다. 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여자도 성적으로 왕성한 시기 혹은 ‘분위기’가 있다. 남자는 야동을 보거나, 술집에 가서 여자와 술을 마시거나, ‘룸’에 간다. 하지만 여자는… 뭐가 있지? 책은 여성의 무척 사실적인 욕망에 대한 소심한 분출이다. 아주 소심한. 무척 인상적인 건 SM이 등장한다는 건데, 사실 이 부분은 다소 의외. 한국에선 미국 혹은 유럽의 여자들이 보인 만큼의 폭발적 반응은 이끌지 못할 것 같다. 기본적인 명성으로 책은 많이 팔리겠지만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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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