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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형삼]사라진 納凉특집

입력 | 2012-08-23 03:00:00


들일 납(納), 서늘할 량(凉). ‘납량’은 무더위를 피해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는 뜻으로 순우리말은 ‘서늘맞이’다. 소복을 입고 산발한 귀신이 날아다니는 드라마를 ‘납량특집’이라 부른다. 귀신 드라마를 보며 나타나는 생리적 현상에 비추어 꽤 과학적인 표현이다. 사람이 공포를 느끼면 뇌의 편도체가 반응해 교감신경이 흥분하고 혈관이 수축되면서 손발이 차가워진다. 땀샘을 자극해 식은땀이 나면 몸을 보온하기 위해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는다. ‘등골이 오싹’해져 ‘모골(毛骨)이 송연(송然·두려워서 몸을 옴츠리다)’하게 된다.

▷공포는 본능 공포와 학습 공포로 나뉜다. 뱀을 보거나 비명을 들으면 본능 공포를 느낀다. 태어나기 전부터 뇌에 내재된 자위(自衛) 본능이다. 학습 공포는 자극의 요인과 관련된 스토리를 떠올려 무서움을 느끼는 것이다. 본능 공포는 자극 요인이 사라지면 바로 없어지지만 학습 공포는 뇌를 계속 자극해 오래 지속되고 더 큰 무서움을 갖게 만든다.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TV 브라운관을 기어서 빠져나오는 영화 ‘링’을 보고 난 뒤 한동안 TV만 쳐다보면 섬뜩해지는 것은 학습 공포 때문이다.

▷지상파TV 3사의 납량특집 공포물이 해마다 줄어들다가 올여름엔 단 한 편도 없었다. 9년 만에 부활한 납량특집의 원조 ‘전설의 고향’도 2년을 못 버티고 막을 내렸다. 시청자들은 케이블TV에서 선혈이 낭자하고 사람의 장기(臟器)가 예사로 노출되는 잔혹한 미국 범죄 드라마에 익숙해 있다. 표현 수위에 제약을 받는 지상파TV의 공포물은 그리 무섭지 않게 받아들인다. 특수 분장과 컴퓨터그래픽이 많아 제작비 부담은 크고, 으스스한 분위기 탓에 광고주들이 협찬을 꺼려 납량특집은 이래저래 천덕꾸러기 신세다.

▷응용수학자 존 L 캐스티는 주가지수와 사회 분위기의 연관성을 다룬 저서 ‘대중의 직관’에서 불경기일수록 공포영화가 인기를 끈다고 분석했다. 공황의 그늘에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사건’이나 흡혈귀 영화가 유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경제상황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납량특집이 자취를 감췄다고 해서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유영철 강호순 조두순 김점덕류(類) 인간들이 활개 치는 현실 속 ‘학습 공포’의 강도가 TV 속 납량특집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