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다섯 오 두: 좀벌레 두
이러한 인식 아래 한비는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는 유가들이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처럼 함으로써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한 주장이 타당성이 없다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유가들은 선왕의 도를 따를 것을 주장하고, 인의를 내세우지만 쓸데없이 용모나 복장 등이나 따지며, 행동보다는 말에 열중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법제에 시비를 걸며 사사건건 현실에도 맞지 않는 고사를 빌려 그들의 사욕을 채우려 하지 국가의 궁극적인 이익을 돌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비는 성인 공자(孔子)가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따른 자가 70여 명밖에 안 됐지만 어리석은 군주였던 노나라 애공(哀公)에게는 백성들이 몰려들었던 것은 명분과 허세에 기대는 유가의 삶의 방식에 대한 심각한 경고인 것이다. 이런 점은 유협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들은 무리 지어 다니면서 군주의 금제(禁制)를 침범하거나 위협한다. 권문귀족 역시 뇌물이나 세력을 동원해 군주의 정당한 사업(전쟁이나 토목사업) 등을 방해하기도 한다. 상공인이나 권문귀족들도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현명한 군주라면 이런 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만 나라도 유지되고 군주도 안정된 정치를 하게 된다는 게 한비의 논지다. 물론 한비 자신이 유세가였다는 점을 스스로 아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