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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낙오자들 ‘거리의 악마’로 돌변

입력 | 2012-08-24 03:00:00

■ 길 걷기도, 집에 있기도 무서운 대한민국… 왜?




"예전엔 늦은 밤이나 으슥한 거리만 아니면 성폭행 같은 건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낮밤 구분 없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끔찍한 일이 생기니 무서워서 못 살겠어요."(김윤미 씨·24·취업준비생)

성폭행 살인 등 강력범죄가 급증하면서 국민들의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지고 있다. 경제성장과 국격 상승에도 아랑곳없이 흉악범죄는 오히려 늘어가고 있다. 나라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는데 시민들은 더욱 불안에 떠는 '위험 사회'가 되어 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8일부터 22일까지 닷새 사이에 무려 8건의 흉기 난동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2명이 숨지고 2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대부분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하철 승객, 퇴근길의 직장인, 두 아이의 엄마, 하교하던 초등생 등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 영문도 모른 채 참변을 당했다. 경남 통영과 제주에서 각각 10세 소녀와 40세 여성이 성폭행을 시도하는 전과자에게 살해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흉악범죄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통계적으로도 우리 사회는 강력범죄가 갈수록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살인 강도 성폭행 방화 등 강력범죄는 2001년 이후 10년간 84.5%나 증가했다. 성폭행은 2002년 6754건에서 2011년 1만9491건으로 3배로 뛰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살인 6위, 성폭행 11위로 범죄율이 높다.

'범죄 방정식'도 깨졌다. 범인들은 굳이 으슥한 곳을 찾거나 야심한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범행 동기도 불분명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누적된 분노를 쏟아낸다. 살인사건 가운데 우발적으로 일어난 비율은 1982년 6.8%에서 1998년 28.2%, 2010년 43.3%로 꾸준히 증가했다. 전 국민이 '거리의 악마'의 위험에 노출된 사회가 됐다.

실제로 최근 두 달간 주요 흉악범죄를 분석해 보면 야심한 시간에 으슥한 곳에서 일어난다는 상식이 더는 적용되지 않는다. 18일 퇴근시간대 경기 의정부역에서는 30대 남성이 지하철 전동차와 승강장을 오가며 승객 8명에게 공업용 칼을 휘둘렀다. 20일 등교 시간에 두 아이의 엄마는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고 집에 들어왔다가 성폭행범에게 살해됐다. 집에서 50m 앞을 잠시 다녀와 벌어진 참변이다. 22일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흉기 난동으로 4명이 크게 다친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해가 지기도 전인 오후 7시 10분경이다. 여의도의 한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은주 씨(30·여)는 "칼부림 사건이 나기 5분 전까지 사건 현장에 있었다"며 "이제는 매일 오가는 도심 번화가의 출퇴근길조차 혼자 다니기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범인들의 면면을 봤을 때도 '범죄자 공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여의도에서 칼을 휘두른 김모 씨(30)와 의정부역에서 공업용 칼을 휘두른 유모 씨(39)는 둘 다 범죄전과가 없다. 김 씨는 한때 신용정보회사에서 부팀장으로 근무했던 화이트칼라였다. 당시 사건의 목격자들도 "안경을 끼고 나약한 인상의 김 씨가 갑자기 칼을 휘둘러 놀랐다"고 했다. 수입이 적은 일용직 노동자나 노숙인이 갑자기 흉악범죄자로 돌변하기도 한다.

노성훈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스스로 낙오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범죄로 표출하고 있다"며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무너진 사회적 안전망을 하루빨리 복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최근 강력범죄 가운데서도 성폭력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10년 새 성폭력 사건이 3배로 증가한 배경에 대해 사회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늘면서 적절한 방법으로 성욕을 해소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온라인 환경이 좋아지면서 아동 포르노 등 음란물이 무분별하게 유포돼 왜곡된 성의식을 확산시키고 있는 것도 성범죄가 느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욕구를 해소할 방법이 없는 남성들이 음란물이 불러일으킨 자극적 충동을 자제하기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단절된 사람이 늘어나면서 성폭력 피해자가 당할 고통을 가늠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욕구충족만을 최우선시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성범죄 증가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물론 범죄 접수 건수가 늘어난 것은 언론 등을 통해 '성범죄 피해를 입으면 신고해야 한다'는 내용의 홍보가 많이 돼 신고 건수 자체가 늘어난 것도 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성범죄가 지능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면서 일부 범죄자들이 범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피해자를 무참히 살해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한편으론 성범죄자가 성폭행만 저지르고 유유히 사라지는 경우도 늘고 있다. 피해자가 다치거나 숨지면 범행 후 더 많은 경찰력이 투입돼 추가 범행을 하지 못할까 우려하는 것이다.

실제로 성범죄 건수는 급증했지만 피해자의 신체 상해 정도는 오히려 가벼워지고 있다. 대검찰청이 매년 집계하는 '범죄 분석' 자료에 따르면 성폭행 과정에서 상해를 입은 피해자가 2008년 883명, 2009년 753명, 2010년 412명으로 줄었다. 장기 입원이 필요한 전치 8주 이상의 상해를 입은 피해자도 38명, 26명, 22명으로 감소했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 교수는 "최근 흉악한 성범죄 사건이 많이 알려지면서 피해자가 겁을 먹고 반항을 포기해 가해자가 물리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필요가 줄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상습적인 성폭행범은 앞으로도 계속 범행을 할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에 범행 흔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피해자를 무리하게 폭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성범죄자들은 아예 잔혹한 수법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히거나 교묘하게 수사망을 따돌리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경기대 대학원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낙오되는 사람들 상당수가 가족이 해체되거나 정상적 인간관계에서 멀어지게 된다"며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받지 못하고 추락하면 범죄 유혹에 취약해진다"고 말했다.

▶ [채널A 영상]CCTV에 포착된 범인, 피해자 집 나서자…

▶ [채널A 영상]묻지마 범죄 벌인 그들은 ‘사회적 고립자’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동영상=‘여의도 칼부림’, 묻지마 흉기 난동범 체포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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