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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서울 북악산 숙정문

입력 | 2012-08-25 03:00:00

통금… 폐쇄… 개방… 권력과 가까운 문, 수난도 많았구나




창의문에서 시작한 서울성곽 스케치가 어느덧 한 바퀴를 돌아 숙정문(肅靖門)까지 왔다. 짧지 않은 길을 걷고 스케치하며 새삼 서울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느꼈다. 언젠가 모든 성곽길이 복원돼 아무런 걸림 없이 성곽을 한 바퀴 돌 수 있다면 서울의 역사적 깊이는 한층 더 빛날 것이다.

○ 기운이 드나들던 문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의미의 숙정문은 1396년(태조 5년) 한양의 도성 문들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과 숙정문이 함께 쓰였는데, 1523년(중종 18년) 기록 이후로는 대부분 숙정문이라고 나온다. 한양 성곽의 북쪽에 있어 북대문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산세가 험한 북악산 위쪽은 길이 험했다. 당연히 백성들이 사용할 일이 적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아예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막았다. 사람들이 경복궁의 ‘양팔’인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면 지맥(地脈)이 손상된다는 풍수지리학적 주장이 받아들여져서다.

서울의 풍기문란을 막기 위해 숙정문을 폐쇄했다는 설도 있다. 북문을 열어놓으면 음기(陰氣)가 들어와 부녀자가 음란해진다는 것이다. 음양오행설에서 북쪽은 음기를 뜻한다. 대신 가뭄이 심해지면 숙정문이 활짝 열렸다. 북쪽이 물을 의미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마가 지면 문은 굳게 닫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04년(연산군 10년) “숙청문을 막고 그 오른편에 새 문을 만들게 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원래 있던 문루(門樓·궁문이나 성문 위에 지은 다락집)는 없어지고 홍예문(虹霓門·윗부분만 아치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문)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추정이 맞는다면 숙정문은 500년 가까이 문루 없이 암문(暗門·성곽에 세운 일종의 비상문)처럼 서 있었던 셈이다. 지금 문루는 1976년 복원 당시 새로 세워졌다. 편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 삶의 터전 내려다보이는 북악산

숙정문을 지나 북악산으로 들어섰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집이나 궁궐 뒤에 있는 산)이었던 북악산의 위엄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현재 숙정문에 가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필수다. 청와대 근처이기 때문에 신분을 확인하고 간단한 신청서를 써야 산을 오를 수 있다.

북악산은 41년 동안 일반인이 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31명이 북악산을 넘어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김신조 사건’이 일어난 뒤로 보안 때문에 폐쇄했다. 북악산 산책로는 2009년에야 다시 개방됐다. 등산을 해보니 이 멋진 산을 오를 수 있게 되어 더없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악산은 결코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될 험한 산이다. 성벽을 따라 놓인 가파른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고 올라선 뒤에야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백악마루에 오르니 눈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경복궁과 광화문 앞으로 뻗어 나간 주작대로가 시원스럽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들이 살던 때 푸른 숲이었던 저 땅이 근사한 빌딩 숲으로 바뀔 줄 짐작이나 했을까? 어쩌면 태조 이성계도 이 자리에 서서 왕조의 새 도읍을 바라보며 부푼 마음으로 조선의 미래를 떠올렸을지 모를 일이다.

이 자리에 서니 자연스레 눈을 감고 서울의 미래를 상상해 보게 된다. 초고층 빌딩으로 가득 찬 화려한 미래 도시보다 편안하고 깊이 있는 역사도시 서울. 그저 서울 성곽 안쪽이라도 편안하고 깊이 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길 바랐다. 하지만 사대문 안에는 앞다퉈 그 높이를 더해가는 빌딩만 가득하다. 잠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접어두기로 했다. 500년 전 서울과 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그래,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곳. 어찌됐건 서울은 서울이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