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과 APEC이 제공하는 기회
북한 노동자의 모습에 혁명광장의 역사가 겹쳐 흘렀다.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아픔이 배어 있는 곳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극동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느닷없이 혁명광장에 집결시켜 6000km 떨어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쫓아냈다. 수많은 고려인이 짐짝처럼 열차로 수송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17만여 명의 고려인이 사막이나 다름없는 허허벌판에 버려졌다. 강제이주 이듬해 7000여 명, 그 다음 해 4800여 명이 숨졌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러시아의 극동은 다른 모습으로 만나고 있다.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광장 앞 대로를 지나는 버스는 대부분 현대차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가장 흔한 외국 광고 또한 LG를 비롯한 한국기업 홍보용이다.
러시아가 APEC을 계기로 획기적인 경제협력 확대를 바라는 첫 번째 후보가 한국이다.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과 러시아 극동연방대가 공동 주최한 국제포럼에 참석한 러시아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한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다. 루킨 아르툠 극동연방대 교수는 “러시아의 극동지역이야말로 한국과 가장 효과적인 경제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바라는 한-러 협력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 남-북-러 천연가스관 사업에 머물지 않는다. 미하일 홀로샤 극동기술연구소 소장은 러시아가 추진 중인 거미줄 형태의 교통망 건설 계획을 공개하면서 북극항로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 고속철 건설사업에도 한국의 참여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서울에서 불과 744km 떨어져 있다. 그 너머에는 극동지역만 따져도 한반도보다 15배나 넓은, 자원이 풍부하고 비옥한 땅이 펼쳐진다. 이런 곳에서 한국을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中日 제치고 달려갈 수 있다
러시아의 극동은 지정학적 이유로도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다. 이양구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러시아와 중국은 절대로 손을 잡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러시아는 2차례 전쟁을 치른 데다 영토분쟁까지 겪고 있는 일본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각축전을 벌여야 하는 한국에 러시아 극동은 ‘단독 찬스’나 마찬가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점령하라’는 뜻이다. 1863년 처음으로 러시아로 이주한 조상들처럼 러시아의 동방으로 뻗어나가야 진취적인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시간이 별로 없지만 내년에 들어설 새 정부는 러시아의 극동을 한국 경제의 도약대로 활용하는 혜안이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