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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허승호]딜쿠샤

입력 | 2012-08-25 03:00:00


서울역사박물관의 로비에는 1920년대 서울 안산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전경과 요즘 사진이 비교 전시돼 있다. 사진에 표지와 설명이 붙은 30여 개의 지형지물 가운데 독립문 근처 인왕산 자락에 ‘딜쿠샤’가 있다. 딜쿠샤는 1898년 한국에 와 금광 채굴업자 겸 기자로 일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가 1923년 짓고 살았던 미국식 2층 붉은 벽돌 건물의 이름이다.

▷테일러는 1919년 UPI통신사의 서울특파원으로 활약하며 3·1운동을 뉴스로 타전해 세계에 알렸다. 그는 이 일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지금의 독립공원)에 갇혔고 1942년 추방될 때까지 딜쿠샤에 살았다. 이곳은 양기탁과 베델이 함께 발행한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도 추정돼 서울시가 몇 년 전부터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건물 맞은편에는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 권율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42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그래서 이곳 지명이 행촌동이다. 역사가들은 은행나무 근처를 권율의 집터로 보고 있다.

▷딜쿠샤는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2006년 방한하면서 실체가 정확히 확인됐다. 그는 아버지가 찍은 서울 사진 17점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명예시민증도 받았는데 서울역사박물관 로비의 옛 사진도 아버지 작품이다. 딜쿠샤는 퇴락했지만 아름답고 기품 있으며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종로구 관계자는 “올해 4월 딜쿠샤의 소유주인 한국자산관리공사로부터 문화재등록 동의까지 받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곳을 무단 점거해 살고 있는 저소득층 10여 호의 이주 대책이 없어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이지만 원래 의미는 ‘마음의 평화’다.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은 언어권마다 다르다. 중국인들은 복사꽃 핀 곳,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했다. 일본어로는 인위적인 것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세계 무카우노사토(無何有の鄕), 고대 영어로는 아서왕의 궁전 카멜롯이며 라틴어로는 현세에 없는 곳 유토피아(Utopia)다. 스페인 사람들은 엘도라도(황금향)라 불러 그들의 현세성을 과시했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로 은향(銀鄕)이다. 언어는 철학이다. 마음의 평화를 이상향으로 삼은 인도인들이 부럽다. 테일러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는 한민족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자기 집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