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질서의 기원/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함규진 옮김598쪽·3만 원·웅진지식하우스
많은 인간들처럼 국가는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이익에 따라 추동되는 행동들도 가치를 포함한 이념의 궤도 안에서 이루어지곤 한다. 냉전시기 미국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통해 외교적 이익을 챙겼지만, 궁극적으로는 봉쇄정책을 입안했던 외교관 조지 케넌이 깔아놓은 이념적 궤도 위에서 승리했다.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선임연구원은 냉전시기의 조지 케넌에 비견되는 이론가이다. 냉전의 종언에 즈음하여 어떤 이념이 더 나은 이념인가를 놓고 투쟁하는 역사는 끝났다는 ‘역사의 종언’ 테제를 제시했던 후쿠야마는 네오콘들과 함께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창립했고, 후세인 독재의 타도를 위해 이라크전쟁을 옹호했었다.
함규진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꼼꼼한 번역으로 한국어 독자들과 만나게 된 이 책은 네오콘과의 결별 이후 확장되고 심화된 후쿠야마의 시공간적 성찰을 담고 있다. 후쿠야마의 새 책이 그의 멘토이자 경쟁자였던 새뮤얼 헌팅턴에게 헌정된 것은 이 책의 의미를 잘 드러내준다. 과거 후쿠야마의 생각은 일원적 문명전파론이었다. 1990년대 초 후쿠야마의 주장이 미국 외교정책결정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을 때, 헌팅턴은 후쿠야마와 달리 비서구사회는 그들 자신의 문화를 버리거나, 서구적 가치나 제도, 관행을 채택하지 않고도 근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세계는 더 근대적이 되는 동시에 덜 서구적이 되어 왔다.
‘원시시대부터 프랑스혁명까지’라는 부제가 시사하듯이 이 책은 과거 후쿠야마의 사유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시공간에 대한 근본적 재성찰을 담고 있다. 한때 그가 지지했던 이라크전쟁 이후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가를 목도하면서 그는 정치적 (무)질서의 배후에 층층이 쌓여 있는 지정학적 조건들에 좀 더 주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후쿠야마가 서구문명권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민주주의는 선거에서의 다수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법과 사회적 견제장치들을 통해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복합적 제도이다. 그것은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류문명의 결실이다. 다만 과거 그 자신이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던 네오콘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레닌의 폭력혁명 방식으로 전파하려 했던 것이 왜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이 책은 다른 문명권에 층층이 쌓여 있는 지정학적 조건들에 대한 세심한 독해를 통해 읽어내고 있다. 이것이 중국과 인도의 부상 앞에서 새로운 대외정책에 골몰하는 미국의 엘리트들이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이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는 한편 북한 중국과 복합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한국인들이 이 책을 일독해야 하는 이유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 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