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근무 하듯이 의원 하다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겠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의 도종환 의원실에 들어서면 마치 문화단체 사무실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책장에는 시집과 인문서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고 수석보좌관부터 비서관까지 사무실 직원들은 다들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근무한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그는 대중이 널리 이름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의원이 된 그의 시를 교과서에서 빼니 마니를 놓고 사회적 논란이 불거지면서 지난달 ‘도종환’이란 이름이 신문방송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렸다. 암으로 세상을 등진 첫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자전적 시집 ‘접시꽃 당신’(1986년)이 100만 부 넘게 팔린 이래 국민에게 시인의 존재를 다시 각인해준 사건이었다. 시는 교과서에 남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새로운 궁금증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공감하는 정서를 쉽고 진솔한 언어로 노래함으로써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시인이 왜 정치에 뛰어든 것일까.
―‘시인 도종환’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국회의원 도종환’이란 호칭이 영 낯설다.
그는 인생의 승부를 정치에 걸 것인가, 문학을 계속하는 사람으로 남을 건가. 두 가지를 견준다면 자신은 후자 쪽이라고 잘라 말했다. “의원이 된 뒤 등 돌린 독자들이 많다. 예상대로 시인으로서 손해 막심한 시간이지만 주어진 시간에 공익근무 하듯이 부지런히 일하다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다.”
―시 게재 논란도 정치에 뛰어들어 생긴 일인데….
“내 시가 교과서에서 빠지게 된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처음 알았다. 국회의원 되니까 별일 다 생기네, 괜히 했구나 싶었다. 정치적 중립성을 너무 경직되게 해석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은 물론 여당 의원까지 반대하고 나서자 3일 만에 해프닝처럼 끝났다.”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외교관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남미에선 문학과 정치를 병행한 작가를 종종 볼 수 있다. 우리가 유독 문인의 정치 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는 ‘수많은 집회 시위 농성에 참여했지만 화염병과 각목은커녕 돌멩이 하나도 손에 들어보지 못한 허약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한다. 옳은 일, 의로운 일에 동참하고 연대하되 거칠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그가 험난한 정치판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민주통합당 대선 주자 문재인 상임고문의 캠프에 합류해 대변인을 맡고 있다. 독설도 서슴지 말아야 할 자리인데 어떤 인연으로 참여했나.
“상근 대변인은 따로 있고 난 가끔 돕는 자리라서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타계한 뒤 구성된 기념사업을 위한 재단에서 문 고문과 함께 일하면서 종종 만났다. 겸손하고 꾸밈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특별히 정치노선을 선택했다기보다 가까이 지낸 사람도 별로 없고 해서….”
그의 삶과 문학은 가난함과 외로움에서 출발했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군납업 실패로 열 살 이후 가족과 헤어져 친척집에서 살았다. 증평 청주 원주를 옮겨 다니며 초중고를 다녔다. 뼈아픈 가난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은 채 학비 부담 없는 충북대 사범대에 들어갔다. 시골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결혼을 했지만 평화로운 시절은 잠시였다. 아내의 죽음과 재혼, 전교조 활동으로 인한 해직과 투옥, 복직 후 자율신경 실조를 앓아 사직, 치유를 위한 10년간 산골 생활…. 살아오면서 자신의 키를 넘는 벽을 수없이 만났다. 그때마다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를 떠올리며 포기하지 않고 고비를 넘겨 왔다. 그의 시 중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즐겨 꼽는 ‘담쟁이’에는 이런 쓰라린 세월이 응축돼 있다.
“화가나 만화가가 되고 싶은 꿈이 좌절되고 거기서 내 문학이 시작됐다. 상처가 있으니까 문학을 하는 거다. 살아온 길이 너무 측은하고 힘드니까 사물 세상 현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 연민에서 시는 출발한다. 대학 들어가 상처받은 마음에 많이 방황하고 좌절했다. 술 먹고 깽판 부리는 내 모습을 문학의 끼가 있다고 오해하는 바람에(웃음) 선배들이 문학 서클에 끌어들였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
첫 아내는 덜컥 병에 걸려 세 살 난 아들과 넉 달 된 딸을 남기고 1985년 세상을 떠났다. 시골 담벼락에 핀 흰 접시꽃을 보면서 병상의 창백한 아내 얼굴이 떠올라서 쓴 작품이 ‘접시꽃 당신’이다. 그때 절절한 심정을 담은 시집이 대중의 폭발적 호응을 얻어 이름 없는 시골학교 교사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됐다. 하지만 문단의 주류에선 ‘대중성에 영합한 저급한 문학’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나는 슬픔을 팔아서 장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담담히 돌아보았다. 최근 펴낸 자전 에세이집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아직도 내 시를 제대로 된 문학으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평론가와 문인이 많다는 걸 압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약점과 부족한 점이 내 시에 있다는 걸 나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아내와 사별하고 6년 뒤 재혼했을 때 많은 독자가 등을 돌렸다는데….
“어떤 독자는 전화를 걸어 ‘시집을 불태웠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강연에 와서 ‘실망했다는 말을 하러 왔다’고 얘기했다. 그런 비난과 욕을 내가 다 감수한다 생각했으나 재혼한 아내에게도 상처와 실망을 주었다. 당당하게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말하지 않고 아이에게 ‘엄마’라고 부를 사람을 만들어준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사실 6년이면 오래 기다린 것이다. 요즘은 삼년상도 안 치르고 재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10년 해직교사로 지낸 뒤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그때 아이들과 보낸 5년은 참 행복했지만 곧 몸에 이상이 생겼다. 아무런 연금 혜택도 없이 퇴직금 1860만 원에 27년간의 교사 생활이 끝났다.
“보은 산골에서 사회운동 지역운동 교육운동을 다 내려놓고 10년을 보냈다. 적막한 산에서 혼자 밥 끓여 먹고 혼자 누워 자면서 글만 쓰고 살았다. 인생에서 가끔 심심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안하고 심심하게 보내는 시간이 인생을 창의적으로 사는 방법이다.”
―조용히 살다가 세상에 불려 나왔는데 임기 동안 하고 싶은 일은….
“문화예술 쪽에서 그동안 하지 못한 일을 실천하는 기회로 삼고 싶다. 가난하고 어려운 예술인들을 위한 복지 예산을 확보하고, 드라마 음악을 넘어 한국을 폭넓게 알리는 방법을 국가 차원에서 마련하고 싶다.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문화 진흥을 도우려고 한다. 우리나라 문학이 이렇게 발전해 왔다는 것을 보여줄 근대문학관을 만들고 싶다. 서울 출신 문인들을 기리는 사업을 펼쳐야 한다. 지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출신 작가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펴는데 서울엔 문학관도 없고 그들을 기리는 사업도 없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
교사에서 시인으로, 이제 생각지도 못한 정치의 길에 들어선 그에게 시란 무엇일까. “나한테 시는 내 인생의 깃발이다. 내 인생의 나침반이다. 내 인생의 길이다. 어디로 갈지 모를 때 한 편의 시가 나왔고 거기서 길이 보였다. 갈등하고 고민한 결과로 시가 나오고 거기서 길을 찾았다.”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박근혜 후보는 안정감과 신뢰를 주는 후보이자 자기 이름을 걸고 다른 사람을 당선시킬 수 있는 스타 정치인이다. 남들은 ‘수첩 공주’ ‘백단어 공주’라고 하는데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행동과 말이 절제된 것이 장점이다. 역사 인식은 문제다. 현재로선 당선될 가능성이 높은데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경우 책을 읽어 보니 이미 많이 준비하고 공부도 많이 한 것 같다. 정책과 관련해 민주당과 공통점도 많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도 훌륭한 점이고 젊은이들의 멘토로서 지지를 많이 받고 있다. 다만 대통령이 되려면 조직과 인재풀이 필요한데 수권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문재인 상임고문은 정치권의 때가 묻지 않아 안과 밖이 같고 정의롭게 살아온 사람이다. 대통령의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보며, 위기관리 능력도 있다. 다만, 노무현의 빛과 그늘을 어떻게 계승하고 극복할지가 과제다.”
―진영논리에 따라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오른쪽에서 보면 왼쪽에 있는데, 왼쪽에서 보면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학자들이 소설가 벽초 홍명희를 평가하는 말이다. 그 말처럼 실제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오른쪽에서 보면 왼쪽에 있는 것으로, 왼쪽에서 보면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극단적인 좌나 극단적인 우가 주변화하고 중도가 중심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중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 중도 좌와 중도 우가 균형을 이루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에게 마지막 질문으로 스스로 묘비명(墓碑銘)을 짓는다면 뭐라고 하겠느냐고 묻자 “담쟁이처럼 살았던, 도종환”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 [채널A 영상]도종환 시, 교과서에 계속 실린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