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인 도쿄특파원
일본에서 일왕이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할 때 이 대통령의 일왕 거론 발언에 일본 사회가 느끼는 부담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를 넘은 일본의 반발을 지켜보면서 도대체 일본이 진짜 민주주의 국가가 맞는지, 또 그들이 과거 저지른 침략과 가해(加害)의 역사를 직시하는지 의문이 커진다.
아키히토 일왕의 부친인 히로히토 일왕이나 증조부인 메이지 일왕은 식민 통치와 침략전쟁에 책임이 컸다.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군이 점령정책 편의상 일왕을 전범(戰犯)으로 처벌하지 않았다고 해서 분명히 존재했던 역사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일본은 패전 후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 있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망언 시리즈와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대표적인 예다. 심지어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처럼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부정하려는 움직임마저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 이 대통령의 사죄를 요구하고 아랫사람 대하듯 “무례하다”고 쏘아붙이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무례한 것이다. 걸핏하면 바뀌는 일본 총리와 달리 한국의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는 ‘국가 원수’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 한국을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쯤으로 여기면서 대통령을 일왕의 총리대신쯤으로 여기는 게 아닌지 묻고 싶다.
일본 극우세력은 역대 정권의 ‘사죄 외교’나 민주당의 배려 외교가 이번 사태를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한국에 막연한 기대감을 안겨줘 문제를 꼬이게 만들었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일본 정치권이 과연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있는가.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없었기에 같은 문제로 아시아 이웃 국가들과 갈등을 되풀이하는 게 아닌가. 일본이 요즘 보이는 식의 태도라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과 평판은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극인 도쿄특파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