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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이복열]징용 가 죽은 삼촌이 무덤에서 울고있다

입력 | 2012-08-31 03:00:00


이복열 호원대 명예교수

해가 질 무렵이면 싸리문 옆에 서서 집 떠난 삼촌을 기다리던 할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삼촌은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키도 크고 학식도 갖춰서 조부모께서는 공부를 계속 시키기로 마음에 두신 터였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한 사람 보내야 하는 징용자에 삼촌이 선발됐다. 1943년 10월이었다.

日서 강제노역하다 1만2000명 사망

삼촌이 스물한 살 나이로 일본에 끌려간 뒤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울었다. 그런 할머니를 보면서 “어른이 되면 내가 꼭 삼촌을 찾겠다”고 다짐했다. 할머니는 결국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나는 1986년에야 면사무소 제적부에서 삼촌이 1944년 6월 6일 오후 8시 일본 나가사키(長崎) 현 다카하마(高濱) 촌에 있는 미쓰비시(三菱) 회사 소유 하시마(端島) 서탄광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쓰비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노역시킨 전범(戰犯)기업이다.

나는 삼촌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일본을 수차례 찾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 패망 때까지 하시마 탄광에서 죽은 사람만 122명이었음을 확인했다. 하시마 탄광 화장장과 탄광에서 죽은 사람들의 유골이 안치된 미쓰비시 직영 사찰 근처 납골당에도 갔다. 납골당에는 커피잔 크기 그릇에 ‘무연고자’라는 이름의 유골이 있었다. 삼촌의 유골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통곡했다.

어느 날 “삼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삼촌과 함께 일했다”며 전북 익산에 살고 있는 한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그분은 내게 삼촌이 석탄을 퍼 올리는 작업을 하던 중 120m 지하 갱으로 추락해 사망했다고 전해줬다.

삼촌의 지난 삶을 추적하면서 나는 일제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게 됐다. 징용노동자, 군인 군속, 노무자, 심지어 성노예로 일본 땅에 강압적으로 끌려간 피해자만 22만여 명, 이 가운데 일본 땅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사망한 사람이 1만2000여 명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많은 대한민국 국민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의 만행을 만천하에 널리 알려 일본의 과거사를 심판해야 한다. 모든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는 법인데 가해자 일본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대한민국 피해자들에게 ‘응분의 배상’부터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때 한국인 노무자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임금도 돌려줘야 한다.

1950년 5월 1일 주일 미군연합사령부가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기업으로부터 보고받은 미지급 임금은 2억3700만 엔(현재 가치로 약 20조 원)이었다. 일제강점기 증언자들에 따르면 미쓰비시는 월급의 3분의 1을 은행에 저축하도록 했는데 이것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미지급된 임금은 현재 일본 법무성에 공탁돼 있다. 이 피 맺힌 돈은 패망 일본의 건설 자금으로 유용하게 활용돼 오늘날 일본 경제를 회복시킨 종잣돈(seed money)이 되었다.

독도 운운하기 전에 배상부터 해야

이 돈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얼룩진 사유재산이다. 고통받은 노동자 개개인에게 돌아가야 한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수교협정 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액 8억 달러에 이 돈이 포함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당시 배상액은 양 국가 간의 협정 사례금인 것이지 미지급 임금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공탁금 2억3700만 엔을 한국 정부에 반환해야 한다.

나의 삼촌은 큰 꿈을 접고 자의와 전혀 상관없이 이국땅에서 모진 대접을 받으며 광부로 일하다 세상을 떠났다. 일본 정부는 삼촌을 비롯한 대한민국 국민의 피해에 대하여 응분의 배상과 진정한 사죄를 해야 한다.

이복열 호원대 명예교수 하시마(端島)한국인 유족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