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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포항 ‘냉수리 신라비’

입력 | 2012-09-01 03:00:00

1500년 역사 또렷하게 지켜온 너, 고고하구나




국보를 찾아 떠나는 스케치 여행은 곧잘 감탄을 동반한다. 특히 야외에서 만나는 석조물이나 탑파(탑의 본말)는 국보라는 이름에 걸맞은 멋진 모습을 자랑한다. 이들이 멀리서부터 발산하는 아우라는 답사를 더욱 즐겁게 해준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하려는 ‘냉수리 신라비’(국보 제264호)는 좀 다르다. 비석의 생김새가 매우 평범하다. 만든 기법이 특이하지도 않다. 주변 풍경도 그저 그렇다. 하지만 학술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 신라시대 재산분쟁 기록한 비석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기록을 적어놓을 수 있는 재료가 적었다. 중국 후한시대에 종이가 발명되기는 했지만 대중적으로 사용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금속이나 돌 위에 글씨를 적어놓은 금석문(金石文)을 남기기 시작했다.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을 금석학이라 한다. 금석학자들에게 냉수리 신라비의 발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이 비는 1989년 지금의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의 어느 밭에서 출토돼 세상에 알려졌다.

비석은 503년(신라 지증왕 4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계미년(癸未年)이라는 연도 표기와 지증왕을 나타내는 칭호(지도로갈문왕)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비석은 오늘날의 공문서 같은 역할을 했다.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를 인정한다는 내용과 그가 죽은 뒤의 상속 방법(그가 죽으면 그 집 아이가 재물을 얻게 하라)을 결정했다고 적어뒀다. 일종의 재산권 분쟁을 처리한 것이다. 이 결정 과정에는 각 부의 귀족 7명(7명의 ‘왕’이라고 표현)이 참가한 것으로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약했던 당시 신라왕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또 앞으로 다른 사람(말추와 사신지)이 재산과 관련해 문제를 일으킬 경우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때도 재산 상속과 관련한 문제가 있었다니 흥미롭다.

○ 신라비가 쐬는 마지막 여름바람

비석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주민센터 앞마당에 있다. 구불구불 68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작은 마을에 들어서면 어렵지 않게 면사무소를 찾을 수 있다. 주차장 한쪽에는 오래되지 않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옆으로 팔작지붕(지붕 위에 삼각형의 벽이 있는 기와지붕)의 비각이 있다. 신라비는 비각 안 네모난 받침돌 위에 얹혀 있었다. 비문은 가공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런 바위 위에 씌어 있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싼 홍살(문이나 건물 벽에 만들어 댄 창살)에 매달려 물끄러미 돌을 바라보았다. 흙 속에 묻혀 있어 보존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비문 글씨의 새김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번에는 비각을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음미했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한낮의 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바람에 날린 나뭇잎들은 비각을 맴돌며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바람이 세월의 흐름마저 거꾸로 돌리는 듯했다. 문득 시간을 넘어서 신라인과 직접 교감하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모양새는 볼품없을지라도 야외에서 만나는 국보는 역시 특별했다.

요즘 문화재는 비각이 아닌 별도의 보호시설로 들어가는 추세다. 소중한 문화재를 보존한다는 취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다.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잘 포장된 선물처럼 거대한 유리 보호시설 안에 들어 있는 모습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

이 오래된 비석 주변에도 조만간 보호시설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어쩌면 자연의 바람을 함께 맞으며 비석을 대면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르겠다. 머리 위 느티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쉼 없이 울어 댔다. 여름도 이제 막바지인걸까. 이 작은 바위는 유난히 무더웠던, 야외에서의 마지막 여름을 훗날 어떻게 기억할까.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