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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부치면 네 딸 죽인다” 그놈 목소리는…

입력 | 2012-09-01 03:00:00

■ 보이스피싱 발신번호 조작 기승… 대응 방법은?




7월 18일 경기 부천시에 사는 송모 씨(37·여)는 직장에서 회의를 하다 딸 이름으로 걸려온 휴대전화를 받았다. 중학교 2학년인 딸(14)이 학교에 있을 오전 10시경이라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중학교 ○반 ○○○ 어머니시죠? 따님이 사고가 났습니다.” 전화기에선 굵은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딸의 학교와 학급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송 씨가 “많이 다쳤느냐”고 묻자 남자는 “딸과 직접 얘기해 보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넸다. 수화기 너머로 어린 여자의 신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눈이 안 보여. 무서워.” 긴가민가했지만 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전화를 건 남자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딸 데려가려면 빨리 1000만 원 보내. 전화 끊기거나 허튼짓하면 칼로 찌른다.”

송 씨는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 회사 1층에 있는 현금인출기로 향했다. 수화기에선 여자의 비명이 계속 들렸다. 송 씨는 급한 대로 계좌에 있던 290만 원을 두 차례 송금했다. 모자란 돈을 부치려고 남편에게 연락하자 남편이 학교에 가보겠다고 했다. 전화기에선 “5분 내로 돈 안 부치면 딸을 죽이겠다”는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속이 다 타들어갈 즈음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딸은 학교에 있었다. 송 씨는 지금도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놈 목소리’가 귀에 윙윙거려 괴로워하고 있다.

○ 발신번호 조작 해외선 얼마든지 가능

자녀나 노부모의 휴대전화 번호로 발신번호를 조작해 전화를 건 뒤 “자녀(노부모)를 납치했으니 돈을 보내라”고 협박하는 신종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보이스피싱 사례가 많이 알려지면서 피해건수는 감소하고 있지만 이 같은 가족 납치 빙자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져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자녀 이름이 뜬 전화를 받으면 납치범이 자녀 전화기를 빼앗아 대신 전화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특히 7월 경남 통영 ‘아름이 사건’이나 8월 30일 전남 나주에서 일어난 7세 여아 납치 성폭행 사건 등 어린 자녀를 상대로 한 흉악범죄가 잇따르면서 부모들은 이런 전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현재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 가운데 가족 납치 빙자가 35%를 차지해 가장 많다.

이런 수법이 성행할 수 있는 건 각종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무단 유출되면서 범인들이 가족 단위 신상정보를 쉽게 입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족 구성원의 직장 및 학교 등 소속을 파악한 뒤 자녀나 노부모의 휴대전화 번호로 발신번호를 바꿔 현금 인출권이 있는 가장에게 전화를 건다.

범인들은 피해자가 자녀나 노부모에게 연락해 사기 여부를 확인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리 해당 번호로 여러 차례 전화한 뒤 학교 수업이나 취침 등의 사유로 전화 연결이 안 되는 때를 노린다. 피해자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욕설을 하거나 스팸 문자를 퍼부어 전화를 끄게 만들기도 한다.

발신번호 조작은 국내에선 금지돼 있지만 중국 대만 등 해외에선 제약이 없다. 경찰 관계자는 “해외에서 음성적으로 운영되는 사설 통신망을 통하면 발신번호를 쉽게 조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채널A 영상] 보이스피싱 일당, ‘어눌한 말투’ 없애려 콜센터 경력자 동원

○ ‘납치 전화’ 오면 112에 신고해야

자녀가 납치됐다는 전화가 오면 즉각 112에 신고하는 게 좋다. 실제 납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통화는 계속하되 메모나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해 주변 사람에게 신고해 달라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발신번호가 자녀 번호이더라도 다른 전화로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전화가 꺼져 있거나 신호음이 가면 ‘납치 전화’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연락이 닿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자녀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평소 자주 가는 곳을 확인해둘 필요도 있다. 경찰 관계자는 “범인들은 피해자의 경찰 신고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협박에 흔들리지 말고 무조건 112에 신고해야 한다”며 “그러면 위치조회 등을 통해 납치 여부를 확인해 주고 납치 가능성이 있으면 바로 수사에 착수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112센터와 은행 콜센터 간에 전용라인을 구축해 피해자가 112에 지급정지를 요청하면 해당 은행 콜센터로 즉시 연결해 해당 계좌에서 돈이 인출되지 않도록 막아준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운영하는 110콜센터(국번 없이 110번)도 유용하다. 바로 상담원과 통화할 수 있어 상황별 대처법을 신속히 안내받을 수 있다.

보이스피싱범으로 의심되는 자에게 계좌번호 등 개인정보를 이미 알려준 상황이라면 곧바로 경찰이나 해당 금융기관에 신고한 뒤 ‘개인정보 노출자 사고예방 시스템’에 등록해야 한다. 국번 없이 1336(한국인터넷진흥원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에 전화해 상담을 받는 것도 좋다. 또 평소에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의 ‘명의도용 방지 서비스’를 이용하면 자신의 개인정보가 얼마나 노출돼 있는지 확인해 예방조치를 취할 수 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고현국 기자 m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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