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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상복의 남자이야기]힘자랑했던 ‘갑’이 더 많이 슬퍼지는 까닭

입력 | 2012-09-01 03:00:00


높이 날아오른 새의 추락만큼 서글픈 것이 없다. 하염없이 떨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남자를 찾아온 선배가 그랬다. 힘 있는 부서에서 ‘갑’ 역할만 하던 선배에겐, 현직의 후배들이 여전히 지시의 대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말 안 되는 청탁을 하면서도 고압적이었다. 남자는 소득 없이 역정만 내고 돌아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다가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협력업체나 후배들에게 두려움을 주던 ‘슈퍼 갑’에게도 날개가 꺾이는 날은 오고야 마는 것이었다.

많은 선배들이 “옛날이 좋았다”고 말한다. 회사에 오래 다닐 수 있었고, 퇴직 후에도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인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스템이 거의 사라졌으며, 선배를 지원할 의지를 가진 후배를 찾아보기도 어렵게 됐다.

남자는 며칠 후, 사람들로부터 그 선배 소식을 다시 들었다. 협력업체들을 돌아다니며 취업활동 중인데 대부분이 핑계를 대어 거절하거나 브로커 노릇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선배가 두고 간 청탁용 자료를 치우며 생각했다. 선배는 혹시, 높이 오르는 데만 여념이 없었던 나머지,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는 진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내려가야만 하는 미래가 두려워서 더욱 자리를 지키는 데만 골몰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인생 4막’ 준비에는 소홀했던 셈이다.

거의 모든 남자의 생애는 4막으로 이뤄져 있다. 1막에선 학생을, 2막에선 직장인과 남편을 연기한다. 3막에 이르러 책임 있는 가장이자 성숙한 사회인으로 정점을 찍고는, 퇴직과 함께 4막으로 낯선 출발을 한다.

그런데 인생 3막까지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사람들이라도, 4막을 앞두고는 좌절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많다. 주로 ‘갑’의 역할만 맡았던 사람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겉보기에는 성공의 길을 줄곧 걸어왔지만, 내실은 제대로 다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협력사에 불친절한 후배한테 “그러지 말고, 있을 때 잘하라”고 잔소리를 해주었다. 힘과 여유가 있을 때야말로 스스로를 돌아볼 절호의 타이밍이다. 언젠가 내려가야 한다는 마음의 준비는 물론이고 ‘새로운 인연을 위한 씨 뿌리기’가 이때 이뤄진다. 더구나 앞으로의 인생 4막은, 1막부터 3막까지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길어질 수 있다고 하지 않나.

힘자랑했던 갑일수록 4막에선 많이 슬퍼진다. 남들 위에 군림했던 추억 때문에 더 쓰리고 아프다. 선배 역시 그럴 것이다. 남자는 선배가 어서 땅에 발을 디디기를 바란다. 그런 후에는 힘닿는 선까지 도와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한상복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