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송인 이숙영 씨가 자신의 아버지가 가꾼 정원으로 몇몇 지인들을 초대했습니다. 텃밭보다는 꽃밭이 넓은 정원에서 눈웃음이 자연스러운 아버지를 뵈니 내 아버지가 겹쳐지네요. 그 아버지가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멋이 중요한 낙천적 로맨티시스트! 이숙영 씨는 젊은날에는 늘 바깥으로만 도는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미워했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가 한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이해하면서 아버지를 닮은 아버지의 딸인 것이 좋다네요.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를 이해하십니까?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리지요?
내 아버지 돌아가신 지 10년, 문득문득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건 아버지 살아생전엔 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좋아했던 나는 어머니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보고, 평가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바깥으로만 돌며 자기 좋은 것밖에 모르는 무책임한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며 걸며 희생적으로 살아온 어머니를 빼고 보면 어머니가 말하는 무책임의 이면이 보입니다. 그것은 낙천성이었고, 자유였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살아 계신가요? 아버지를 자존감이 중요한 황혼기의 한 남자로서 진심으로 이해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틀 속에 가둬 놓은 채 기대하거나 요구하거나 했던 어린 날들의 생각을 접어보면 아버지의 꿈이 보이고 사랑이 보이고 좌절이 보이고 두려움이 보입니다. 이상하지요? 나는 아버지를 이해했을 뿐인데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나 자신이 결박해 놓거나 금지해 놓은 것 속에는 결코 하찮다 할 수 없는 하찮은 경험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니 알겠습니다. 내가 왜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는지. 당신이 왜 어머니의 아들 혹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을까요? 나는 생각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머니,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서, 여인으로서, 남자로서 이해하는 거라고. 이해하게 되면 관대해지고, 관대해진 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파울루 코엘류가 그랬습니다. 나 자신을 관대하게 풀어주는 일이야말로 인류 전체를 관대하게 풀어주는 일이라고.
부모는 참 희한합니다. 아무것도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죽어서도 스승이니까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면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꿈이 일어나 춤을 춥니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사는 나 자신과의 교감이기도 합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