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논설위원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안철수의 생각’ 첫머리에 쓴 것처럼 ‘안철수 현상’이 일어난 지 1년이 됐다. 사실상 대선 공약집인 이 책의 출간 두 달도 안 돼 책방엔 안철수에 관한 책이 어린이용까지 18권이나 새로 나왔다(박근혜 5권, 문재인 4권, 손학규 2권).
‘무릎팍 도사’ 속 발언, 사실과 달라
‘신화는 처음부터 거짓이었다’는 부제대로 안철수가 대통령감으로 뜬 MBC ‘무릎팍 도사’의 핵심 내용이 팩트가 아니라면, 머리끝이 쭈뼛 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안철수에게 매료된 것도 그가 초창기 컴퓨터백신을 무료 배부했고, 혼자 이룬 성공이 아니므로 직원들에게 주식을 무상 배분했으며, 세계 최대 백신회사의 1000만 달러 매각 제안을 국익을 위해 단칼에 거절한 듯 말한 데서 시작됐다.
당시 기사를 검색해 보니 과연 사실과는 차이가 있었다. 1997년 동아일보의 ‘인기 소프트웨어 공짜로 쓰세요’ 기사처럼 그때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고 백신사업을 하려면 일단 백신을 깔아주는 게 당연했다. 주식 무상 배분도 ‘최근 벤처업계에 찬바람이 불면서 직원들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경영진의 주식을 나눠 주는 현상이 부쩍 늘었다’며 안철수를 예로 든 2000년 연합뉴스를 보면 감동은 반값 된다.
특히 1000만 달러 건은 고교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어 사실 여부가 중요하다. 1997년 11월 3일자 미국의 PR뉴스와이어는 맥아피 자료를 인용해 “맥아피와 안랩이 제품을 한국시장에 독점 공급할 조인트벤처를 만든다고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맥아피 측은 “우리의 앞선 테크놀로지를 안랩 고객들에게 확산시키기 바란다”고 했고 안철수는 “세계적 백신기업인 맥아피로부터 우리는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내용을 안철수는 널리 알리지 않았다. 대신 동아일보 1998년 1월 14일자 인터뷰에서 “지난해 10월 맥아피가 백신 ‘V3’를 팔라며 1000만 달러(약 180억 원)를 주겠다고 했지만 노(No)했다”고 밝혔을 뿐이다.
명예욕과 정치공학 잘못 만나면
안랩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발행 의혹 등 검증을 요하는 사안은 이 밖에도 많다. 그런데도 안철수는 접근이 불가능하고 ‘노무현 청와대’ 출신 대변인은 답할 가치도 없다며 자르기 일쑤다. 금태섭 변호사가 “안 원장이 팩트를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페이스북에 ‘진실의 친구들’이라는, 소련신문 프라우다(진실)를 연상케 하는 제목을 달고 선별 대응하는 것도 놀랍다.
진실을 아름답게 포장한 애국심 마케팅으로 뜬 인물은 2005년에도 있었다. “과학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며 우리를 황홀하게 했던 황우석 박사다. 줄기세포 조작사건이 드러나기 전에는 “황우석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소리까지 나왔다.
황우석과 안철수는 우울한 시대, 영웅을 고대하는 집단 히스테리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소름끼치게 닮았다.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잘하는 것도, 거짓과 폭로가 꼬리를 문다는 것도 비슷하다. 매스컴이 띄웠고 정치적 요소가 개입됐다는 건 똑같다. 황우석 때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민주주의가 퇴행할 때 어떤 일이 나타나는지 보여준 사건”이라고 지적한 것도 현 상황과 너무나 맞아떨어진다.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사람인 줄 알고 사랑에 빠졌다. 뒤늦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날 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 사랑을 어쩔 것인가. 황우석 사건 때 온 나라가 경험했던 멘붕(멘털 붕괴)을 또 겪을까 두렵다. 제발 거짓이 아니길, 거짓이라면 꼭꼭 감추길 바랄 뿐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