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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장강명]노부인의 여름

입력 | 2012-09-03 03:00:00


가을에 비정상적으로 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현상을 영어로는 ‘인디언 서머’라고 한다. 이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한 모양이다. 인디언이 기습하듯 갑자기 찾아온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고, 이때 연기와 안개가 발생하는 게 인디언들의 봉화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설, 실제로 이 기간에 인디언들이 겨울나기를 위한 사냥을 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어감이 낭만적이고, 겨울을 앞에 두고 잠깐 더워진다는 상징성도 있어서인지 멜로 영화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증시에서는 하락 국면에서 잠시 주가가 상승하는 현상을 ‘인디언 랠리’라고 부른다.

▷가을의 반짝 더위에 대해서는 유럽에서도 ‘노부인의 여름(old wives' summer)’ ‘물총새의 날’ ‘성(聖) 마틴의 여름’ ‘성 루크의 여름’이라는 식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중부 유럽에서 쓴다는 말인 노부인의 여름은 늦더위를 가리키는 우리 표현 ‘노염(老炎)’과 작명 센스가 닮았다. 점잖게 번역하느라 노부인이지, ‘늙은 마누라들의 여름’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노부인의 여름에 대해서는 9월 말을 가리키는 것이니 11월 초에 나타나는 ‘인디언 서머’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한국에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이유로 노부인의 여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력 당국이다. 한여름에는 전력 수요가 높지만 그에 대비해 발전소도 최대한 가동하고 기업에 미리 절전 경영도 당부한다. 절전 캠페인도 비교적 호응이 좋다. 반면 가을에는 발전소들이 점검에 들어가고, 시민은 ‘가을에 무슨 전기 걱정’이라고 여긴다. 이때 갑작스러운 더위가 찾아오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어 어’ 하는 사이에 전력난이 일어난다. 지난해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벌어진 날도 9월 15일이었다.

▷올여름 가장 우려했던 기간인 8월 중순과 하순에는 이렇다 할 전력 위기가 없었다. 산업체 휴가 분산, 국민발전소 건설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집중호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진짜 위기는 9월에 올 것”이라는 말이 솔솔 나온다. ‘천수답(天水畓) 전력 행정’이 딱하긴 하나,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늦더위에도 정신을 잘 차리고 전력난을 경계하는 일뿐이겠다.

장강명 산업부 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