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00만 신도 이끌어…
부인과, 金주석과 함께 3일 별세한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2010년 열린 통일교 행사에 부인 한학자 세계평화여성연합 총재와 참석해 밝은 표정으로 신도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1991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고 있는 문 총재(오른쪽 사진). 통일교 제공
1957년 완성된 통일교 교리서 ‘원리강론’은 그의 종교관을 구체화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를 신령과 진리로 통일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것. 개신교계에서는 통일교 창시 때부터 우상화와 지나친 현세주의 등을 들어 통일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도 통일교의 경제력을 앞세운 기업 활동과 대규모 합동결혼식 등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논란 속에서도 1957년 일본을 시작으로 해외 선교를 본격화해 50여 년 만에 국내 10만여 명 등 세계 194개국, 신도 300여만 명(통일교 추산)으로 급성장했다.
고인은 통일교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교육과 기업, 언론, 학술, 스포츠,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다. 일화, 선원건설, 세일여행사, 용평리조트, 세계일보, 프로축구단 일화 등이 속한 통일그룹이 있으며 지난해 보도된 이 그룹의 자산만 2009년 말 기준으로 1조7361억 원 규모다. 이 밖에 선문대와 청심국제중고교, 선화예술중고교, 미국 통일신학대학원(UTS)과 브리지포트대, 미국 통신사 UPI와 워싱턴타임스, 일본의 일간지 세카이닛포, 유니버설발레단, 리틀엔젤스예술단 등이 통일교 계열에 속한다.
부인과, 金주석과 함께 3일 별세한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2010년 열린 통일교 행사에 부인 한학자 세계평화여성연합 총재와 참석해 밝은 표정으로 신도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1991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고 있는 문 총재(오른쪽 사진). 통일교 제공
고인은 특히 국제 지도자와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 옛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만난 것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주요 정치인들을 만나 초종교, 초국경, 세계평화 활동을 펼쳤다.
2008년에는 고인과 가족, 통일교 신도들이 탄 전용헬기가 악천후 속에 경기 가평군 장락산에 불시착했으나 경미한 부상자 외에는 모두 무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9년 펴낸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에서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포함한 해외 지도자들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특히 이 책을 통해 “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세상의 문제 인물입니다.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라고 세간의 평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통일교 창시부터 현재까지 문 총재와 통일교에 대한 수많은 논란과 관계없이 고인은 통일교 그 자체였다는 게 종교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편 해외 언론들은 3일 문 총재의 별세 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AP,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BBC 등은 장문의 부고 기사를 실어 해외에서도 상당한 통일교의 영향력을 반영했지만 일부 기사는 그를 ‘이교(cult) 지도자’로 평가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