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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강혜승 기자의 엄마 도전기]한국의 사교육은 태교부터?

입력 | 2012-09-05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강혜승 기자

얼마 전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이어폰 줄을 배에 두른 임신부를 봤다. 얇은 옷차림이다 보니 눈에 띄어 한참을 뚫어지게 봤다. 이어폰 줄은 임신부가 손에 들고 있는 mp3와 연결돼 있었다. 배에 이어폰을 붙이고 있었던 거다. 태아에게 직접 음악을 들려준다는 음악 태교용으로 배에 붙이는 이어폰, 일명 ‘벨리(Belly)폰’이다. 한 개에 5만∼6만 원씩 실제 온·오프라인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이다.

‘천재는 엄마가 만든다’는 소리를 듣긴 했어도 클래식 명반을 찾아 한두 번 들어본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밖에서도 배에 이어폰을 붙인 임신부를 보니 태교가 마냥 남의 일이 아니었다. 배 속 아이를 어린이집에 대기 등록시키며 이미 경쟁사회로의 편입을 절감한 터 아닌가. 소아과 의사인 친구에게 “태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냥 열심히 살아. 그게 태교야.” 친구는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태교가 뭐길래 이 야단들일까. 책부터 찾아봤다.

1800년 조선시대 사주당 이씨(師朱堂 李氏)가 썼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태교 지침서 ‘태교신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승의 십년 가르침이 어머니가 임신하여 열 달 기르는 것만 같지 못하다.’ 태교신기가 제안하는 태교법은 다음과 같다 ‘옷을 너무 덥게 입지 말고, 음식을 너무 배부르게 먹지 말고, 때때로 가벼운 행보를 하며, 찬 곳 더러운 곳에 앉지 말고, 악취를 맡지 말고, 노력이 지나쳐 몸을 상하게 하지 말고….’

하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육아서들이 강조하는 태교는 좀 다르다. 글자 그대로 배 속의 아이를 가르치는 ‘학습 태교’다. 책들은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며 교육열에서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 엄마들을 임신부 시절부터 자극한다. 아기의 건강만을 빌던 예비엄마들은 이제 건강은 기본이고 ‘장차 우리 아이가 똑똑해야 할 텐데’라는 마음으로 무장된다.

가르치는 과목과 방법에 따라 태교의 종류도 다양하다. 수학태교, 영어태교, 명화태교, 음악태교, 태담(胎談)태교, 동화태교, 호흡태교, 바느질태교…. 이름은 다르지만, ‘똑똑한 아이 낳는 태교’, ‘두뇌 자극 태교’, ‘영재 태교’ 등으로 목적은 비슷하다.

학습 태교에도 매년 트렌드라는 게 있는데, 그래도 유행 불문 핫(hot)한 태교는 영어태교다. 어떤 임신부는 부른 배를 칠판 삼아 “아가야∼ 이게 A고, 이건 B야∼”라며 손가락으로 알파벳을 써 가며 가르친다.

이건 약과다. 수준 있는(?) 엄마라면 태담을 영어로 나눠야 한다. “Hello, my little angel∼ It's your Mommy∼(안녕, 우리 꼬마 천사∼ 엄마란다∼)” 서점에는 ‘엄마가 쓰는 영어 문장 베스트 50’ 같은 지침서가 넘쳐난다. 영어 강사 수준이 아니면 엄마 자격도 없다는 식이다.

수학을 배 속에서부터 가르친다며 극성을 부리는 임신부도 있다. 그래야 아이의 머리도 좋아지고 집중력도 좋아진단다. 주변에서 ‘수학의 정석’을 붙들고 씨름하는 예비엄마도 많이 봤다. 친구 하나도 그런 얘기를 주워듣고는 당장 수학 문제집부터 구했다. 고등학교 수학까지는 필요 없을 듯해 중학교 2학년 참고서를 샀다. 학창시절 ‘수학 좀 했던’ 자존심으로 수학 영재들이나 푸는 문제집을 골랐다. 결국 미적분도 아니고 집합 문제서부터 막혀 친구의 수학태교는 좌절됐다.

‘태교는 과학이다’라는 책을 낸 박문일 한양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영어태교, 수학태교가 정말 효과가 있나요?”

“없어요. 엄마들 욕심이죠. 오히려 태교한다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안 좋습니다. 임신부들한테 최대 적이 스트레스인데.”

“그럼 태교 자체가 효과가 없다는 말인가요?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는데요?”

“태교가 과학이라고 할 때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엄마가 태아에게 충분한 영양, 좋은 환경을 주는 게 태교예요. 태아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우리 전통 태교가 과학적으로도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수학태교로 수학 잘하고, 영어태교로 영어 잘하게 될 거란 믿음은 임신 중에 닭고기를 먹으면 아이 피부가 닭살이 된다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하다. 한국 예비엄마들은 태중의 아이를 벌써부터 교육 전쟁으로 내모는 걸까. 사교육 경쟁의 태교편인 셈이다.

그렇다고 엄마들만 나무랄 수는 없는 일.

하나 많아야 둘인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육아서들을 펼쳐 보면 엄마에게 요구하는 게 너무 많다. 그냥 많기만 한 게 아니다. 어떤 책은 우리 전통 방법으로 아이를 업어 키우며 ‘애착 양육’을 하라 하고, 어떤 책은 서양식으로 신생아일 때부터 따로 재우는 ‘독립 양육’을 하라 한다. 선택이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역설은 태교에도 적용된다.

육아 상품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방황하지 않으려면 엄마들에게도 철학이 필요하다. 그래서 육아서에서 본 문장을 오늘도 되뇐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