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드러내기보다 치유하는 공간으로 설계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관람은 거친 자갈을 깔아놓은 쇄석길을 걷는 것에서 시작된다. 설계자인 전숙희(왼쪽) 장영철 부부 건축가가 기대 서 있는 쇄석길의 왼쪽 옹벽에 단발머리에 한복을 입은 소녀와 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벽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데드마스크를 전시해 놓았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아래에 자리 잡은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증언하는 공간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100만∼200만 원씩 내놓은 성금을 주춧돌 삼아 지었다. 2004년 건립위원회를 발족해 올해 5월에야 개관할 정도로 곡절이 많았는데, 개관 후엔 극우 일본인들의 말뚝 테러 대상이 돼 버렸다.
박물관 설계자는 전숙희(37) 장영철(42) 와이즈건축 공동대표.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한 이 건축가 부부는 박물관 설계로 최근 서울시 건축대상 2등상인 최우수상을 받았다.
“상징성이 없는 공간에 좁게 자리 잡은 것이 오히려 의미 있다고 봅니다. 잡초처럼 오랜 시간 싸워온 피해자들의 처절함이 느껴지는 듯해서요.”(전)
이 박물관은 동선이 중요하다. 지하 1층→계단→2층→1층의 순서를 밟아야 박물관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 로비 왼쪽 철문을 열면 6m 높이의 옹벽에 그려진 한복 입은 소녀의 옆모습과 꽃 그림이 방문객을 맞는다. 소녀의 시선을 따라 저벅저벅 소름 돋는 소리가 나는 쇄석(碎石)길을 걷다 보면 문득 지하 영상전시관이 나온다. 영문도 모른 채 컴컴한 전쟁터로 끌려간 위안부들의 처지를 실감케 하는 도입부다.
지하 전시관은 보일러실을 개조해 만들었다. 어두운 조명과 퀴퀴한 냄새,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마주치는, 멍석 깔아놓은 천장 낮은 골방. 위안소를 재현해놓은 공간에 시선이 미치면 마음은 끝없이 가라앉는다. “어느 날엔 할아버지 한 분이 멍석 위에 앉아 펑펑 우시더라고요.”(장)
이어 계단을 통해 2층 전시관으로 가는 길. 벽 표면을 걷어내고 군데군데 흉터처럼 팬 시멘트 벽돌을 그대로 드러냈다. 낡은 벽돌 위엔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국어로, 일본어로, 영어로 글귀를 적어놓았다.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다’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검은 전벽돌을 교차쌓기와 (앞으로) 내어쌓기로 지어 올린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전경. 김두호 씨 제공
박물관은 서울시 소유의 서대문 독립공원에 짓기로 하고 서울시의 사업인가까지 받았지만 광복회 등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반대하는 바람에 성산동으로 쫓겨 왔다. 박물관 건립엔 용지 구입비 17억 원을 포함해 20억 원이 들었고 5억 원은 정부에서 지원했다. 박물관 ‘기부자의 벽’엔 8000명이 넘는 개인과 단체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중 3000여 개의 이름은 일본 후원자들이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