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수백 년 된 왕소나무가 뿌리를 드러내고 쓰러진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나무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수없이 많았다. 왜 어떤 나무는 태풍을 견뎌내고 어떤 나무는 태풍에 쓰러지고 말았을까.
태풍이 지나간 거리를 걷다 보면 지상으로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져 있는 왕벚나무나 플라타너스들은 대부분 키가 큰 나무들이다. 바로 그 옆에 있는 키 작은 쥐똥나무나 풀잎들은 언제 태풍이 불어왔느냐는 듯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아름드리 거목들이 태풍을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꼿꼿하게 태풍과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태풍에 대한 그들의 당당한 태도는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죽음의 결과는 너무나 처참하다. 만약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유연하게 자신을 낮출 수 있었다면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약함보다는 거목으로서의 강인함을 먼저 생각하고 태풍과 싸워 이기려고 노력했다.
꼿꼿하게 맞선 거목들 쓰러져
풀잎을 보라. 풀잎은 태풍에 쓰러지지 않는다. 풀잎은 태풍이 불어오면 일단 몸을 굽히고 삶의 자세를 겸손의 자세로 바꾼다. 풀잎이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태풍과 맞서는 경우는 없다. 행여 쓰러진 풀잎이 있다 하더라도 태풍이 지나간 뒤에는 대부분 스스로 일어나 하늘을 본다. 그러나 나무는 한번 쓰러지면 누가 일으켜 세우지 않는 한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
사람도 그렇다. 자신을 낮추지 못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남 앞에 군림하는 자세로 서 있던 이들은 결국 부정과 부패의 태풍 앞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 스스로 자신을 이 시대의 지도자라고 여기는 이들도 국민 앞에 육체의 고개는 숙이지만 마음의 고개는 제대로 숙이지 않는다. 그래서 국민의 선택이라는 태풍이 불어오면 자신을 굽히지 않고 태풍과 맞섰던 나무처럼 쓰러지고 만다.
사람이든 나무든 직선보다 곡선의 삶의 자세나 형태가 더 아름답다. 새들은 곧은 직선의 나무보다 굽은 곡선의 나무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함박눈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만들어져, 굽은 나무의 그늘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편히 쉰다. 사람도 직선의 사람보다 곡선의 사람의 품 안에 더 많이 안긴다. 직선보다 곡선의 나무나 사람이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넉넉하고 따뜻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중국 명나라 철학자 왕간의 드렁허리(미꾸라지나 뱀장어처럼 가늘고 긴 물고기) 이야기다. 물이 바짝 마른 생선가게 큰 대야에 드렁허리들이 마치 죽은 것처럼 서로 얽히고 눌려 있었다. 그런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갑자기 드렁허리들 속에서 나와 아래로 위로, 좌로 우로, 앞으로 뒤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자 죽은 것 같았던 드렁허리들도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렁허리들이 다시 삶의 의지를 회복하게 된 것은 미꾸라지 한 마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기운을 주고 소통을 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꾸라지는 왜 갑자기 그렇게 움직인 것일까. 그것은 드렁허리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본성에 따라 생기 있게 움직인 것일 뿐이다.
인간도 자신을 낮춰야 살아남아
태풍도 마찬가지다. 자기 본성에 따라 본연의 삶을 사는 것뿐이다. 인간을 파괴하겠다든가 회생시키겠다든가 하는 의도는 없다. 다만 인간이 태풍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을 뿐이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