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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같은 인생… 아직 돌을 던질 때는 아닙니다

입력 | 2012-09-07 03:00:00

직딩 웹툰 ‘미생’ 단행본 출간 앞둔 윤태호 작가




윤태호 작가는 “정해진 칸에서 나의 이로움을 위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수를 고민하는 바둑은 외모 성질 등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는 인생과 참 닮았다”고 설명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바둑의 세계는 냉정하다. ‘집중력 향상에 그만’이라는 삼촌 손에 이끌려 바둑도장에 갔고, 새벽마다 뚫어져라 기보책을 봤다. 신동 소리를 들으며 11세에 한국기원연구생이 됐지만 프로입단에서 미끄러지는 순간 바둑돌을 던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웹툰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바둑판보다 더 넓은 세상에 던져지게 된다.

미생을 그린 윤태호(44)는 성공보다 실패, 결과보다 과정에 방점을 찍는 만화가다. 전작인 ‘이끼’가 대성공을 거뒀고, 포털 다음 웹툰 평점 1위를 고수하며,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명강사인 그의 성공 스토리를 떠올리면 의외다. 미생의 단행본 출간을 앞두고 4일 그가 대우교수로 있는 세종대 연구실을 찾았다.

“성공의 의미를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노동자들을 탄압하면서 매출액을 올린 기업가는 성공한 인물일까요?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학자들이 성공한 인생인가요? 저는 미생의 주인공이 성공에 집착하기보다 바둑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제가 가난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보다는 잃어본 사람, 열외가 돼 본 사람에게 더 마음이 끌려요.”

미생(未生)은 ‘아직 살지 못한 자’라는 바둑용어. 만화는 프로기사 입문에 실패해 완생(完生)을 이루지 못한 주인공이 대기업 계열사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겪는 조직생활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자기가 돋보이려고 부러 ‘폭탄’ 동기와 프레젠테이션 짝을 맺는 인턴들, 잘되면 제 덕, 못 되면 부하 탓하는 부장, 항상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일에 매달리는 워커홀릭 과장…. 웹툰이 연재되는 날에는 ‘직장생활의 애환을 담은 진정한 성인만화’ ‘책 나오면 얄미운 상사와 눈치 없는 신입 책상 위에 살포시 놓고 싶다’처럼 공감을 표하는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린다.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는 작가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주는 다수의 샐러리맨 ‘딥스로트’ 덕분에 ‘리얼리티 최강 직딩 필독 웹툰’을 그려내고 있다. 웹툰과 함께 소개되는, 1988년 조훈현 9단과 중국의 최강자 녜웨이핑 9단이 맞붙은 제1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결승 최종국의 한 수 한 수도 깨알 같은 재미를 더한다.

“소수의 영재가 우리를 먹여살린다면 서울이라는 도시에 이렇게나 많은 빌딩, 책상, 형광등이 필요할까요. 사람들은 모두 한 점에서 출발하지만 각자가 도달하는 지점은 다릅니다. 직장 내에서 성취속도가 다르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은 아니지요. 누구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는 법이죠.”

직장인들의 희로애락을 그린 웹툰 ‘미생’. 위즈덤하우스 제공

전작과 달리 미생의 내용은 밝고 희망적이다. 아무 쓸모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바둑이 결정적인 순간 주인공의 기사회생을 돕는 장면에서는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이끼’처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자는 제안은 많이 들어오지만 쉽게 팔리진 않을 거예요. 독자들이 인물 간의 극적인 갈등보다 ‘이건 나와 닮았어’ 하고 공감하는 지점에서 재미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