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화의 세계곳곳에 길상동물들 그려놓고 액막이로 써
‘수렵도병’(12폭 중 가운데 10폭),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종이에 채색, 586.0X106.5cm. 민화 호렵도가 그려진 12폭 병풍에는 가파른 산을 배경으로 한 사냥 장면이 역동적이고 해학적으로 표현돼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그런데 17세기 초, 거꾸로 우리가 중화이고 다른 민족을 오랑캐로 보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한족인 명나라가 만주족에게 나라를 뺏겨 중국의 정통성에 문제가 생기면서부터다. 조선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고, 조선이 중국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여겼다. 이른바 ‘소중화주의’다. 그래서 청나라가 일으킨 전쟁도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1637)처럼 ‘호란(胡亂)’이라 불렀다. 효종(재위 1649∼1659) 때는 아예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北伐論)까지 제기됐다. 거대한 중국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오랑캐에 불과했던 것이다.
○ 수렵도를 둘러싼 동상이몽
박지원은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재위 1735∼1795)의 70세 생일인 만수절 축하사절단에 끼어 있었다. 팔촌형인 박명원(朴明源)의 비공식 수행원이었다. 사절단은 건륭제가 머물던 피서산장으로 향했다. 만수절에 맞추기 위해 연경(현 베이징)에서 열하까지의 700리(약 280km) 길을 나흘 만에 달려가느라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열하 방문은 그렇게 이뤄졌다.
당시 청나라 황제가 사냥하는 그림이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이것이 호렵도로 발전했다. 원래 청나라에서는 몽골족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렵도를 제작했지만 그걸 본떠 만든 우리나라의 호렵도는 전혀 의미가 달랐다. 호렵도는 청나라에 대해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그들의 전술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나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받은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던 조선에서는 호렵도를 통해서 청을 이해하고자 했다. 정조(재위 1776∼1800) 때 궁중화원인 김홍도(金弘道·1745∼1806년 이후)가 호렵도를 잘 그렸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의 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런 배경 때문에 단순한 감상화가 아닌 군사적 목적을 띤 그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드라마처럼 흥미로운 민화 호렵도
주목할 만한 사실은 군사와 관련이 없는 민간에서도 호렵도가 유행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겐 호렵도가 두 가지 용도로 활용됐다. 첫째, 만주족의 호방한 기질을 담고 있는 호렵도는 잡귀를 쫓는 액막이로 여겨졌다. 둘째, 후대로 갈수록 민화 호렵도는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상(吉祥)의 용도로도 쓰였다. 사냥꾼들이 말 대신 기린, 해태, 백호, 코끼리 같은 전혀 엉뚱한 서수(瑞獸)를 탄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이다. 군사적 목적이 분명했던 호렵도는 점점 여느 민화와 다름없이 액막이와 길상의 그림으로 보편화한 것이다.
조선의 조정은 결국 청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그래도 서민들은 ‘청나라=오랑캐’란 의미가 담긴 호렵도란 용어를 끝내 고수했다. 특히 민화 작가들은 호렵도의 형식을 빌려 서민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를 그려내기도 했다.(글을 쓸 때 이상국의 ‘조선 후기 수렵도 연구’(2012년)를 참고했음)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한국민화학회 회장 chongpm@g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