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 깎고, 축대 쌓아, 물 대고, 벼 심은 생존투쟁 현장
○ 산비탈 곡선은 생존 위한 투쟁 흔적
다랑이논은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일군 계단식 논이다. 경사진 산간지역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비탈을 깎고 축대를 쌓아 만들었다. 거기에 물을 대고 벼를 심은 모습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생존을 위한 투쟁의 흔적까지 담겨 있다. 그래서 더욱 가치가 높다.
내가 가천마을의 다랑이논을 찾은 것은 이런 아쉬운 이야기를 듣고 난 뒤였다. 사진작가인 친구로부터 수도 없이 추천을 받았던 터였다. 친구는 오래전 버스를 갈아타며 남쪽 지방을 여행하다 가천 다랑이논을 만났다고 했다. 그때 찍은 사진에 담긴 남해 가천마을은 오랫동안 내 여행 희망지 리스트에 담겨만 있었다. 그래서 출발을 서둘렀다. 그간 방문을 미루다가 사라진 문화재가 얼마나 많았던가.
○ 남해는 아직 푸른 벼의 물결
먼 길을 떠나 드디어 가천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풍경 그 자체로 더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뒤로 우뚝 솟은 설흘산(雪屹山)이나 계곡 사이로 모여 있는 정겨운 농가들의 풍경, 해변의 기암괴석을 끼고 펼쳐진 남해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단 한 곳, 내가 기대했던 초록빛 가득한 논은 그곳에 없었다. 종종 밭이 눈에 띄었지만 아무것도 심지 않은 곳이 훨씬 더 많았다. 그곳엔 다랑이논이란 이름만 남은 산비탈 계단만 있을 따름이었다. 늘어난 숙박시설과 음식점,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고즈넉한 맛도 사라진 뒤였다. 내가 너무 늦게 온 걸까. 아쉬움이 떠나질 않았다. 벼 이삭의 물결을 머릿속으로만 그려봤다. 오래 머물지 않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우리나라 쌀 자급률이 80%대로 추락했다는 말이 들린다. 식량 안보라는 표현도 이젠 익숙하다. 지금은 비록 황량한 벌판이지만 언젠가 가천마을 다랑이논이 다시 활기를 찾은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우리가 먹는 밥알 하나에는 얼마나 많은 이의 노고가 담겨 있는가. 밖으로 나가 가까운 곳의 논을 바라보자. 얼마나 깊은 아름다움으로 벼 이삭들이 출렁거리는지를 확인해 보자.
■ 이장희·안재선씨 ‘서울이야기 展’
‘O₂’에 ‘스케치 여행’을 연재하는 이장희 씨와 일러스트레이터 안재선 씨가 다음 달 7일까지 서울 종로구 익선동 서울53호텔 1층 ‘아트스페이스 53’에서 ‘서울이야기 展’을 엽니다. 누구보다 서울을 사랑하는 두 작가가 복잡한 골목길 안의 작은 호텔에서 소곤소곤 서울을 이야기합니다. 경복궁 정동 북촌 한강 등 서울 곳곳의 담백한 풍경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무료. 오전 10시∼오후 9시. 02-763-3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