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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입력 | 2012-09-08 03:00:00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
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18일까지 열리는 문학그림전에 나온 최석운 화가의 ‘흰 바람벽이 있어’. 통인옥션갤러리 제공

한 편의 잔잔한 영화와도 같다.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시간, 적막한 방에 홀로 앉은 남자는 남루하고 비참한 현실을, 늙으신 어머니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리며 사무치는 슬픔과 그리움에 젖는다.

백석(白石·1912∼1995)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는 1939∼1945년 만주를 떠돌던 시인의 절절한 심정이 배어 있다. 식민지 시대에 별처럼 등장한 꽃미남 ‘모던 보이’는 지금 길상사로 변신한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 여사(자야)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헤어진 뒤 만주로 떠났다. 이상향과 사랑의 시원을 찾아서 떠난 자발적 유랑의 길이었으나 하루하루 일상은 힘들고 고달팠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가장 아름답고 빼어난 시들이 쓰인 시절이 되었다.

그리고 백석은 어느 날부터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맑은 서정적 시어에 굽이굽이 이야기가 녹아 있어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그를 주제로 한 석·박사 논문만 600여 편을 헤아릴 만큼 한국 문학사에서 빼어난 시적 성취를 인정받고 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석의 시가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제 통인옥션갤러리에서 개막한 문학그림전이다. 백석 시와 화가 10명의 작품이 대등하게 교감하는 전시에서 화가 최석운 씨는 70년 전 시인의 쓰라린 고독을 오늘의 현실로 무리 없이 불러왔다.

시는 어렵고 지친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바라보는데, 그렇다고 절망에서 끝나지 않는다. 운명의 짐을 하늘이 부여한 몫으로 선선히 받아들이되 꿋꿋함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조용히 길어 올린다. 마지막 대목은 이런 구절로 이어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절망의 견고한 벽 앞에서도 삶을 ‘포기’가 아닌 그 반대의 ‘긍정’과도 같은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남루했던 백 년 전에 태어난 한 남자가 지금, 무엇이든 넘쳐나서 큰일인 이 시절의 벽에 대고서 마음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치유를 건네주는 듯하다.

흰 바람벽이 여기에 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