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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연극 ‘북어대가리’… 20년 기다린 반가움, 도식적 인물 아쉬움

입력 | 2012-09-11 03:00:00

이강백 원작 ★★★




대조적 인생관을 보여주는 기임 역의 김은석(왼쪽)과 자앙 역의 박완규. 극단 수 제공

1993년 초연 당시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이강백 원작의 ‘북어대가리’가 근 20년 만에 무대화됐다. 전무송 최종원 등의 배우들이 창단한 극예술발전연구회의 창단 공연이었던 이 작품은 물품보관 창고를 무대로 두 명의 창고지기의 대조적 삶을 통해 방향성을 잃은 현대 한국인의 상실감을 훌륭하게 형상화했다는 평을 들었다. 당시 연출을 맡았던 김광림 씨는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후 앙코르 무대가 계속 무산되면서 재공연 기회를 갖지 못해 왔고 이번에 연출가 구태환 씨가 이끄는 극단 수가 제작했다.

무대를 압도하는 것은 일련번호가 붙은 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나무상자들이다. 내용물을 알 수 없는 그 상자들은 창고 안에서 분류되고 보관됐다가 배달된다. 그 상자들 속에서 수십 년을 동고동락한 중년의 두 창고지기,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자앙(박완규)과 현실도피를 꿈꾸는 회의주의자 기임(김은석)이 주인공이다.

자앙은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반면 기임은 그런 지루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데서 생의 의욕을 끌어낸다. 상자를 배달하는 트럭운전사의 바람둥이 딸 미스 다링(박수현)이 나타나면서 두 사람 간 균형이 무너진다.

연극에서 창고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부조리한 세계를 상징한다. 자앙이 기임을 위해 끓여주고 남은 북어대가리는 본질적 삶을 잃고 관념 또는 환상에 의존해 생존을 지탱하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자앙은 기임이 떠나며 남기고 간 북어대가리를 마주한 채 고독과 허무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선다.

창고는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의 도서관을 닮았고, 자앙과 기임은 베케트의 ‘고도를 찾아서’의 두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인물과 대사가 도식적이어서 메시지가 너무 뻔히 드러났다. 그래서일까. 관념적 대사의 숲에서 관능적 몸의 연기를 펼친 박수현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 : i : : 23일까지 서울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3만 원. 02-889-3561∼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