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르타주의 생명은 현장이다. 르포르타주를 쓰기 위해서는 작가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지영은 쌍용차 사태의 가장 치열한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는 2009년 77일간의 파업에 없었다. 파업을 하는 측과 막는 측의 격심한 폭력 대립을 촉발한 원인에 대해서는 양측의 견해가 엇갈린다. 현장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어느 한편의 주장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줄 텐데 불행하게도 공지영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일방적으로 한편의 말만 전달하고 다른 편의 말은 아예 듣지 않았다. 그것은 르포르타주가 추구하는 정신이 아니다.
▷책 표지에는 ‘77일간의 뜨거운 파업의 순간부터 22번째 죽음까지, 작가적 양심으로 써내려간 공지영이 쓴’이라는 광고문구가 있다. 쌍용차 사태를 직접 보지 못한 공지영은 대신 죽은 22명의 사연을 파헤치는 르포르타주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도 않았다. 22명 중 자살자는 12명으로 줄어든다. 자살자 중에서는 무급휴직자 부부 한 쌍과 정리해고자 한 명, 희망퇴직자 두 명 정도의 사연만 비교적 소상히 나온다. 죽음은 그 하나하나가 귀중한 것인데 나머지 죽음은 숫자로만 거론됐다. 쌍용차 사태와 무관한 죽음까지 포함시킨 그 숫자가 크게 과장됐기 때문일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