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탑속 어머니-석등속 아들, 가슴 저린 천년의 대화
○ 석탑에 남은 연기 스님의 효심
탑은 본래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탑은 형태에 따라서 크게 일반형과 이형(異形) 두 가지로 분류한다. 경주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일반형 석탑이다. 이 양식을 벗어난 탑은 이형석탑이라고 부른다. 석가탑의 옆에 서 있는 다보탑이 대표적이다. 8세기경 만들어진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도 대표적인 이형석탑이다.
탑은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 형태다. 사자들 사이에는 스님 한 분이 합장을 하고 서 있다. 스님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모습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석등이 있다. 석등에는 또 다른 스님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찻잔을 들고 있다. 이는 연기 스님을 형상화한 것이다. 즉, 탑과 석등은 연기 스님이 어머니에게 차 공양을 드리는 모습인 것이다. 탑을 지켜볼수록 오묘한 조화와 모자의 깊은 사연에 빠져들었다.
대한불교진흥원에서 발행한 책 ‘화엄사’에 따르면 연기 스님은 절을 지은 후 어머니를 지리산으로 모셔 왔다. 스님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머니께 차 공양을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연기 스님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석탑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 태풍 지나간 곳에 남은 고요함
화엄사에서의 하룻밤은 제15호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강타한 직후였다. 각황전의 몇몇 기왓장이 바람에 날아갔고 부러진 소나무 가지도 눈에 띄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늦지 않게 방에 들어와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툇마루에 나가 쭈그려 앉았다. 밤바람이 잔잔하게 풍경(風磬)을 흔들었다. 마음을 두드리는 울림.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한밤의 금당을 향해 걸었다.
효대 주변은 고요했다. 좀 전까지 불던 바람도, 바람에 흔들리던 풍경 소리도 이곳에는 없었다. 이 고요를 위해 이 탑을 다른 전각들로부터 홀로 떨어뜨려 놓은 건 아닐까. 하얀 돌이 달빛 아래 빛났다. 연기 스님이 이고 있는 석등에 내려앉은 달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나는 한밤중 어머니와 아들의 조용한 대화를 지켜보았다. 불교에 귀의한 뒤에도 천 년이 넘게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효심. 스님이 손에 든 찻잔에서 흘러 나오는 향기가 고운 달밤을 은은하게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