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民黨의 흥망성쇠가 한눈에
그 후 약 7년. 1952년 10월과 1953년 4월에 총선이 실시됐다. 두 총선에서 사회당의 약진이 두드러지자 경제계를 포함한 보수 세력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회당은 점차 세력을 키우며 ‘개헌 저지’를 할 수 있는 3분의 1 의석을 차지한다.
그러자 보수도 결집하게 된다. 1955년 11월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자유민주당(자민당)이 탄생했다. 이때쯤 하토야마 씨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1954∼1956년 총리를 지냈고, 재임 기간에 보수합당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자민당의 초대 총재가 됐다. 전후 50년 이상 일본을 이끌어 온 자민당 역사의 시작이었다.
자민당 일당지배체제는 경제정책의 지속성과 예측가능성을 높였다. 자민당 정부는 철강, 자동차, 전기기계, 전자 등 전략산업을 선택해 연구개발 보조, 세제상 우대조치, 국내 시장 보호 등을 통해 집중 지원했다. 기업들에 유리하게 자금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금융도 주물렀다. 기업들은 과감한 설비투자와 고용, 그리고 성장으로 화답했다.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하자 국민들은 자민당에 열광했다. 1950, 60년대 자민당의 지지율은 60% 안팎이었다.
하지만 1973년 1차 오일쇼크를 기점으로 경제가 주춤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 정국은 보수와 혁신의 백중세가 이어졌다. 자민당은 단독으로 과반을 채우지 못해 친여 무소속을 흡수해 겨우 정권을 유지했다.
1980년 6월 22일 중의원과 참의원 동시 선거는 중요 풍향계였다. 흔들리기 시작한 자민당이 종점에 도착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선거였다. 하지만 자민당은 중의원 의석 511석 중 과반을 훨씬 넘는 284석을 차지했다. 국민들은 변화로 인한 불안한 미래보다 안정을 바탕으로 한 현재를 택한 것이다.
# 좌절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미 1960년대 중반 이후 자민당은 파벌주의와 ‘돈’ 정치에 휘말리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표적 정치 스캔들인 록히드사건과 리크루트사건도 터졌다. 1976년에 일어난 록히드사건은 미국의 록히드사가 일본 정부의 고위 인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린 사건이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가 기소되고 자민당 의원 여섯 명이 탈당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