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주필
박정희 논쟁 없이는 못하는 정치
김일영이 노무현 정권 3년차이던 2005년에 낸 ‘건국과 부국’은 객관성 있는 역사해석으로 이념적 성향을 떠나 학계의 주목과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2012년 대선 정국을 예언이나 한 듯하다. 역사를 정치적으로 공방하는 데 가담하고 있는 정치권과 정치패거리가 된 일부 먹물들이 한번 읽기를 권한다. 나이 50을 넘기지 못하고 가버린 ‘학자다웠던 학자’ 김일영이 너무 아깝다. 김일영의 ‘건국과 부국’ 개정신판 에필로그(박정희 정권, 어떻게 볼 것인가)를 열어보자.
죽은 지 25년(지금 기준 32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박정희가 현실정치의 중심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를 둘러싼 논쟁이 보다 학문적이고 객관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그가 관련되는 논쟁은 아카데믹한 차원에서 시작되었어도 어느새 현실정치세력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침윤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수혜자와 피해자가 아직 다수 남아있다는 점도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방해하는 요인이다.
흔히 영국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획기적 사건을 순차적으로 겪으면서 양자를 조화 있게 발전시켜온 대표적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실제 영국의 경험은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그 후의 대부분의 국가들의 경험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영국은 병행발전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선구적 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정말 어렵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후발산업화 국가들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방식의 산업화를 추진한 구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 그리고 최근의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에 이르기까지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병행시킨 나라는 없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 정권하에서 일어난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은 영국을 ‘선구적 예’로 하는 일반적 경험에서 보아 크게 일탈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실존하지도 않았던 영국 모델을 근거로 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론’을 가지고 박정희 시대를 비판하는 일도 이제는 그쳐야 한다.
역사의 잔가지 아닌 숲을 보라
올해 80세인 차피득 회장은 ‘미꾸라지 진짜 용 된 …’이란 책의 표지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꼭 읽어주세요’라고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덜 여문 보리 이삭을 미리 잘라다 허기를 면하던’ 시절을 회상하고, ‘이 지구상 그 많은 나라 중에 하필이면 한국에서 태어나 이 고생을 하나’ 한탄했다고 털어놓았다. 차 회장은 바로 그 대한민국이 2차 세계대전 후에 식민지에서 독립하거나 새로 탄생한 85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것을 ‘미꾸라지 진짜 용 된 나라’라고 쉽게 표현했다. 그러면서 한국 최고가 세계 최고로 된 사례를 수없이 열거했다.
이런 내용도 있다. ‘만약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후 지금까지 북한처럼 굶어죽고 못사는 나라로 남아 있었더라면, 일본의 기만적 한일합방은 일본 주장대로 정당화되어 일본 사람으로부터 거봐라 라고 조롱을 받을 뻔했다. 우리도 이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인물 이승만 박정희 정주영 이병철 박태준 같은 인사들을 교과서나 위인전에 올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또 긍지를 갖게 하고,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널리 알릴 때가 되었다.’
김일영, 차피득 두 사람의 글을 소개하며 나는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다. 역사의 잔가지가 아닌 숲을 보자. 외눈이 아니라 두 눈으로 역사를 보자. 선배들이 피땀 흘려 이뤄놓은 역사 앞에 좀더 겸손하자. 선거 때마다 대한민국 역사를 흠집 내 국민 자존심을 긁는 일은 이제 그만하라.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