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많이 봤는데….”
지난해 1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유흥주점을 운영하는 임모 씨(35)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모 씨(33)가 중학교 후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신지체 1급 장애를 갖고 있는 이 씨의 중학생 시절 모습이 어렴풋이 겹쳤다. 경찰 단속이 심해져 업소는 매일 파리만 날리고 도박으로 돈을 잃은 상태였다. ‘저 녀석 수중에 돈이 좀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빠르게 범행 계획을 세웠다.
“나 기억나지? 우리 같은 중학교에 다녔는데….” 영문을 몰라 하는 이 씨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 씨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 한잔 살게”라며 자신이 운영하는 술집으로 데려갔다. 지적능력이 초등학생보다 떨어지는 이 씨는 ‘중학교 선배인가 보다’ 하고 임 씨를 따라갔다.
“이 술집 좋지? 내가 이 술집이랑 제주도 펜션도 갖고 있는데 여기에 투자하면 돈이 두 배가 된다.”
임 씨는 이 씨를 이렇게 꾀어 자신의 계좌로 돈을 보내도록 했다. 이 씨는 지난해 3월부터 6개월 동안 11차례에 걸쳐 임 씨 계좌로 돈을 보냈다. 현금 500만 원을 뽑아 임 씨에게 갖다주기도 했다.
부정(父情)으로 쌓은 독립자금을 모두 빼앗은 뒤에도 임 씨는 올해 5월 이 씨에게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라”며 범행을 계속했다. “돈이 없으니 900만 원을 달라”는 아들의 말에 통장을 확인한 이 씨의 아버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잔액이 없었다. 아들은 임 씨의 이름과 전화번호만 안다고 했다.
이 씨의 아버지는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임 씨는 범행을 부인했지만 서울 송파경찰서는 그가 도박을 한 사실과 채무관계 등을 집중 추궁해 범행 사실을 밝혀내고 18일 임 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20년 동안 힘겹게 모아온 1억 원은 임 씨의 도박자금과 유흥주점 운영비로 모두 사라져 버린 뒤였다.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