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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계 숨은 꽃]공간미학 창조하는 무대디자이너 여신동 씨

입력 | 2012-09-20 03:00:00

생생하고 독창적 세팅… “귀를 연 덕분이죠”




연극 ‘필로우맨’의 무대에 선 무대디자이너 여신동 씨. 이 작품은 양면에 거울을 맞댄 트윈미러를 사용해 주인공이 형사들로부터 취조받는 공간과 주인공의 내면공간을 함께 보여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3년 전만 해도 그는 한 해 한두 편의 작품만 위탁받는 무대디자이너였다. 대표작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학생 시절부터 조명과 무대미술에 참여했던 뮤지컬 ‘빨래’ 단 한 편이었다.

“내 이름을 건 창작자가 되고 싶었어요. 낯가림이 심해서 낯선 사람들과의 작업도 어려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진짜 예술가가 되자는 생각에 유학을 결심했죠.”

정식 미술 공부를 위해 뉴욕으로 떠난 그는 1년간 어학연수 틈틈이 브로드웨이 공연을 봤다. 소품 하나하나까지 사랑스러운 ‘라이언 킹’과, 반대로 여백의 미를 십분 살린 ‘빌리 엘리어트’의 무대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모든 것을 버리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쌓아올려야 하지 않을까. 무대디자인이라는 게 공동 작업인데 그동안 너무 내 고집만 피웠던 게 아닐까.’

마침 한예종 선배이자 ‘빨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추민주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극장 공연만 해왔던 ‘빨래’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중극장 무대에 올리게 됐으니 잠시 귀국해 새 무대 디자인을 맡아달라고.

두 말 없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2009년 두산아트센터 ‘빨래’ 공연은 무대디자이너 여신동(35)에게도 일대 전환점이 됐다. ‘빨래’는 이후 3년 넘게 대학로에서 무기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두산아트센터 창작자지원 아티스트로 뽑혔고 두산아트센터 기획공연의 무대디자인을 전담하다시피 하게 됐다.

2010년엔 6편의 무대디자인을 맡았고 연극 ‘구보 씨의 1일’로 동아연극상 무대기술·미술상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일제강점기 경성의 지도, 전차, 풍경 등을 소박하지만 입체적인 영상으로 구현해 격찬을 받았다.

이후 무대미술가로서 그의 이름은 수많은 작품에서 발견된다. 2011년 박근형 연출의 연극 ‘햄릿’, 김동현 연출의 연극 ‘디 오서’, 박정희 연출의 ‘예술하는 습관’, 조용신 연출의 뮤지컬 ‘모비 딕’, 오경택 연출의 연극 ‘레드’ 등 14편이나 됐다. 올해도 벌써 ‘목란언니’ ‘873미터의 봄’ ‘헤다 가블러’ ‘필로우맨’ 등 8편의 무대가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새로운 중극장 시대가 낳은 총아이기도 하다. 그가 디자인한 작품 대부분이 두산아트센터와 명동예술극장, 남산예술센터, 세종M씨어터 등 500석 안팎의 중극장 무대다. 연말엔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일 고선웅 연출의 ‘리어외전’으로 대극장무대에 도전한다.

그의 급부상에는 어떤 비결이 숨어 있을까.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연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작업이고 그중에서도 연출자의 구상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제 창의성만 고집하기보다는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디자인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한 예로 배우들이 4면에서 출현하는 ‘목란언니’의 다이아몬드 형태 무대는 그가 연습현장에서 전인철 연출의 자유분방한 스타일과 순발력 넘치는 배우들을 지켜본 결과 탄생했다. 여주인공이 S자 형태로 휜 2층 계단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헤다 가블러’의 무대는 배우 이혜영의 강렬한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구상했다.

그는 좋은 무대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으로 ‘단시간에 승부하려 하지 말고 차근차근 꾸준히 걸어가는 자세’를 꼽았다. “소극장 무대디자인 하나 맡으면 300만 원도 못 받습니다. 1년에 세 편이라고 해도 1000만 원도 안 됩니다. 하루빨리 성공하려고 마구잡이로 작품을 수주하다가 창의력이 고갈돼 떠나는 선배들을 많이 봤습니다. 재능이 있다면 다작을 하기보다는 하나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제 그의 목표는 무대미술가 출신으로 세계적 연출가가 된 로버트 윌슨처럼 공간의 미학으로 승부를 거는 연출가가 되는 것. 내년에 드라마보다 무대디자인에 초점을 맞춘 창작극 ‘사보이 사우나’(가제)로 연출가 데뷔를 준비 중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