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프탈렌/백가흠 지음/308쪽·1만3000원·현대문학
등단한 지 11년 만에 첫 장편 ‘나프탈렌’을 펴낸 소설가 백가흠. 현대문학 제공
기자가 소설가 백가흠을 처음 본 것은 지난해 11월 논산에 있는 소설가 박범신의 집에서였다. 이날은 서울 생활을 접고 귀향한 박범신의 이삿날로, 뒤늦게 소식을 들은 명지대 교수 시절 제자 이기호와 백가흠이 밤 12시가 넘어 도착했다. 백가흠은 섭섭해하는 스승의 기분을 풀어주려 문단 내에서 진행되는 작가들의 후끈한 연애사나 일부 학교에서 벌어지는 문인 교수들의 첨예한 갈등사를 실감나게 전했다. 그의 입담에 푹 빠진 사람들은 피곤함도 잊은 채 배를 잡고 낄낄댔고, 자리는 오전 3시를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소설가를 웃기는 소설가가 백가흠이었다.
다른 일면도 있다. 2001년 등단한 백가흠은 앞서 소설집 세 권을 냈다. 주목받는 작가로도 꼽혔다. 첫 장편에 대한 본인과 주위의 기대감이라는 부담도 생겼다. 지난해 문학과지성사 웹진을 통해 장편 ‘향’의 연재를 마쳤지만 그는 이를 책으로 묶지 않았다. ‘첫 장편’이란 이름표를 달아주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1년 만에 ‘나프탈렌’을 펴내며 첫 장편을 신고했다. 자잘한 이야기를 잘했던 작가답게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과 사건이 중첩돼 펼쳐지며 진행된다. 중심인물은 있지만 주인공은 없으며, 주변인물은 있지만 조연은 없는 일상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각자의 사연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하나의 탄탄한 이야기가 되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지방의 한 암환자 요양시설인 하늘수련원에서 지내는 암환자 양자, 양자의 어머니 김덕이 여사, 그리고 원장을 비롯한 수련원 사람들이 이야기의 한 축이다. 다른 축은 노년의 교수 백용현과 그와 이혼한 손화자, 조교 공민지와 공민지의 옛 애인이다. 언뜻 평온해 보이는 이들의 일상은 미세한 균열로 헝클어져 버린다. 하늘수련원의 꼬장꼬장했던 원장은 자신의 노모가 죽자 실성해 버리고, 탐욕에 찼던 백용현이 아내의 죽음을 통해 삶의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뜬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미덕은 작위적이지 않다는 것. 인물들이 혼란스러운 인생의 항로에서 헤매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차분히, 설득력 있게 전한다.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들을 묶는 키워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만큼이나 삶에 대한 간절함이다. 소설의 제목인 ‘나프탈렌’처럼 사람들은 살아간다. 늙음, 그 한발 뒤에 서 있는 죽음을 방지(지연)하기 위해 방부제인 나프탈렌처럼 악착같이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스스로 기화돼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 허허로움이 책장 가득 배어 있다.
묵직한 주제를 다뤘지만 저자의 ‘장난기’도 몇 군데 숨어 있다. 노교수 백용현이 자신의 늙고 처진 몸을 거울에 비춰 보는 장면이나, 조교 공민지의 잠든 모습을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훑는 장면 등은 박범신의 ‘은교’ 속 장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백가흠의 오마주인 것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