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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문재인은 노무현을 지워야 보인다

입력 | 2012-09-24 03:00:00


황호택 논설실장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대선후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든 역대 대통령 중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만 참배함으로써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는 인식의 일단을 드러냈다. 민주당 내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옛 민주당 계열은 “현충원을 찾은 김에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도 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열린우리당 계열은 “모두 참배했더라면 오히려 정체성에 혼란이 생겼을 것”이라고 문재인을 감쌌다. 박근혜 안철수 후보의 ‘통합’ 참배와 달리 문재인의 ‘편 가르기’ 참배는 지지층의 확장이라는 선거전략 측면에서도 현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내 경선 기간에는 지지층의 결집을 끌어내는 행동이 효과적이겠지만 대선은 전통적 지지 세력에 플러스알파(+α)를 붙이는 게임이다.

문재인은 후보 수락연설문에서 “협력과 상생이 오늘의 시대정신”이라며 ‘소통과 화합’ ‘공감과 연대’의 리더십을 발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치인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달싹거리는 입술만 쳐다봐서는 안 된다. 과연 문재인이 상생과 화합의 대통령이 될지는 과거와 현재의 선택과 행동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호철 양정철 전해철 실세 ‘3철’

530만 표 차로 결판난 2007년 대선은 이명박과 정동영의 대결이었지만 이명박 대(對) ‘노무현 5년’이라는 의미가 컸다. 문재인은 마지막 합동 연설회에서 “5년 전 우리는 참여정부가 무능하다는 프레임에 빠져 민주정부 10년의 자긍심을 버린 채 선거에 임했고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고 대선 패배의 원인을 색다르게 분석했다. 이에 대해 손학규 후보는 대선 패배의 책임이 있는 세력이 ‘자긍심이 없어서 대선에서 졌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라고 반박했다. 문재인이 비록 민주당 경선에선 이기긴 했지만 2007년 대선 패배의 참여정부 책임론에 대해서는 손학규의 발언에 공감하는 국민이 더 많을 것이다.

문재인이 국정 경험을 갖고 있는 점에서는 안철수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안철수는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에서 “낡은 체제와 결별해야 하는 시대에 ‘나쁜 경험’이 적다는 건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한다”며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예로 들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주지사를 했고 오바마는 주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다.
문재인이 청와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임기를 같이한 것은 대통령 후보로서 자산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문재인을 돕는 사람들 중에는 ‘노무현 청와대’ 출신과 노무현 재단 출신이 다수다. 문재인 캠프에서는 노무현 청와대에 근무했던 이호철(전 민정수석비서관) 양정철(전 홍보기획비서관) 전해철(전 민정수석비서관·현 의원)이 ‘3철’로 불린다. 무(無)보직 실세다. 문재인은 ‘용광로 선대위’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지만 누가 그의 귀를 잡고 있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국민의 매서운 심판을 받고 폐족(廢族)을 자처하던 친노들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결집해 민주당의 주도권을 잡고 문재인이라는 기획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문재인 주변에서 친노들이 얼씬거릴수록 국민은 실패한 노무현 정치의 부활을 떠올릴 것이다. ‘노 대통령과 우리는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정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청와대를 떠났다…매사 도덕적일 뿐 아니라 능력 면에서도 최고의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데 참여정부 때 그랬는지를 묻는다면 겸허하게 돌아보게 된다.’(회고록 ‘운명’ 446∼448쪽) 문재인은 이러한 서술의 진정성을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은 이, 박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지 않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묘소에 찾아가고 싶지 않은 국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지층만 싸고돌고 다른 쪽을 향해서는 거침없이 적개심을 쏟아낸 그 편 가르기의 졸렬함 때문이다. 기자들은 노무현 5년 동안 직업인으로서의 굴욕감과 함께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도대체 언론과 전쟁하기 위해 대통령이 됐단 말인가. 노 전 대통령은 품격을 떨어뜨리는 거친 표현으로 국민의 신뢰를 까먹었다. 청와대 참모들 중에도 대통령을 흉내 내 험악한 언사를 쏟아낸 사람이 여럿 있었다.

5년 국정경험은 자산이자 족쇄

문재인이 ‘노무현 청와대’에서 대(對)언론 자세에 관한 한 386 참모들과는 달랐다는 출입기자들의 증언도 있긴 하다. 출입기자들의 전화는 소속사를 구분하지 않고 받았다는 것이다. 문재인이 친노들의 등록상표인 ‘편 가르기’ 언론관의 포로가 아니라면 민주당의 당론인지 아닌지도 애매한 종편 출연 거부부터 철회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이 대선에서 승리하고 나아가 5년의 국정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의 국정 운영 스타일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깊은 성찰’이 따라야 한다. 노무현의 색깔을 지워야 비로소 문재인이 국민에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