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대중음악 등 문화전반이 부글부글 끓는다
“인문계-우골탑-백수. 이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온 나도 참 한심하다.”(‘백수 대나무숲’)
‘∼ 대나무숲’이란 이름의 트위터 계정 바람이 거세다. 시작은 12일 한 출판 종사자가 만든 ‘출판사 옆 대나무숲’이었다. 비밀번호를 공개해 누구나 익명으로 글을 남길 수 있는 이 공간은 개설 직후부터 돈만 좇는 출판계 사장들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 일은 많고 박봉인 직원의 처지에 대한 토로 등 울분과 자조, 비판의 글이 가득하다. ‘대나무숲’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대나무 숲에서 외쳤다는 삼국유사의 고사에서 따온 말. 이후 보름도 안 돼 ‘방송국 옆 대나무숲’ ‘IT회사 옆 대나무숲’ ‘이공계 대나무숲’ 등 10여 개의 직종별 ‘대나무숲’ 계정이 잇달아 생기고 있다.
두 사례는 우리 사회 곳곳의 분노가 위험 수준에 이르렀음을 반영한다. 최근 중장비 기사가 주차단속에 불만을 품고 굴착기로 경찰차와 경찰서를 부순 사건이나, 한 젊은이가 실직의 분노 때문에 여의도 대로변에서 옛 직장 동료들에게 흉기를 휘두른 사건도 임계점을 넘은 분노가 사회 곳곳에서 폭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분노의 화살’에 열광하는 세태
지난해 영화 ‘도가니’와 올해 초 ‘부러진 화살’은 분노의 화살을 파렴치한 기득권층,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법제도에 돌려 영화를 본 관객의 ‘공분’을 일으키며 파문을 몰고 왔다.
TV 드라마 ‘추적자’도 ‘나쁜 권력’을 마주한 소시민의 분노가 극의 주된 정서적 줄기를 이뤘다. 손현주가 맡은 백홍석 역은 강력반 말단형사로 심리적, 물리적 분노를 표출하기에 적절한 캐릭터다. 무조건적 희생이나 사회적 야욕을 앞세운 가장이 아닌, 자연스럽게 자존감과 분노를 표출하는 가장으로 분해 시청자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대중음악도 예외가 아니다. 빅뱅 멤버 지드래곤은 최근 솔로 2집을 발표하며 ‘그 ××’라는 곡을 내세웠다. 사랑하는 여인의 바람둥이 남자친구를 지칭하며 반복적으로 ‘그 ××’라는 어구를 사용한다. 자진해서 ‘19세 미만 청취불가’ 딱지를 붙였는데도 음원 차트 정상을 밟았고 여전히 상위권에 머물고 있다.
1990년대 H.O.T.의 ‘전사의 후예’, 젝스키스의 ‘학원별곡’ 등에서 보였던 아이돌 가수의 사회비판형 분노 음악도 최근 부활했다. 소녀시대, 샤이니 등이 속한 SM엔터테인먼트의 신인 아이돌 그룹 엑소케이는 5월 발표한 ‘마마’란 노래에서 현대인들의 소통 부재와 인간성 상실을 성토했다. 다른 신인 아이돌 그룹 BAP는 ‘파워’에서 권력과 재력을 가진 강자들에 대한 분노를 거친 랩으로 표출한다.
○ 취업난 세대가 분노코드의 근원
‘분노왕’의 정승우 연출가는 프로그램 제작 계기에 대해 “인터넷 포털인 다음이나 아고라 게시판에는 ‘너무 화가 나요…’로 시작하는 글들이 넘쳐난다. 이들의 사연을 들어보자는 취지로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분노 코드’가 도처에 만연한 것은 우리 사회의 소통이 한계에 이르렀으며 곳곳에서 감정이 억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중문화를 통한 분노 표출이 대리충족을 통한 분노 해소 역할에 도움을 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오히려 분노의 극단적인 표현인 폭력에 자극받을 수 있다. 갈등을 해소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문화 생산자들에게 “알맹이 없이 태도만을 위한 분노는 감정의 소모에 가깝다. 형식에 함몰되지 않고 진정한 비판 의식을 갖춘, 냉철한 분노가 예술에서는 더욱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