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꿈 되찾아주려 세상 밖으로…수막구균성뇌수막염센터 홍보-예방활동 팔걷은 최승숙 씨
9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딸이 다리를 잃은 뒤 엄마 최승숙 씨(41)는 강해져야 했다. 최 씨는 8월부터 한국수막구균성뇌수막염센터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나윤이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나윤이 같은 아이가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 씨는 오늘도 마음을 다잡는다. 대구=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면 고통은 수술 이후가 더 컸어. 무릎 위와 팔을 살리기 위해 피부 이식을 했잖아. 1주일 간격으로 5번이나. 썩은 피부를 벗겨내고 소독하고, 생살을 떼어 붙이는 과정. 얼마나 고통스러웠니. 오죽하면 어린 네가 이렇게 말했겠니. “엄마, 나 그냥 죽여줘. 너무 힘들어서 못 살겠어….”
네 말을 듣고 나는 결심했어.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나윤이, 네가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자고. 이때부터였어. 내가 강해지겠다고 다짐한 건.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마지막 날이었지. 아침부터 너는 미열이 있었어. 일을 나가며 말했지. “오늘은 학원 가지 말고 집에 있어. 엄마 일찍 올게.” 오전 11시쯤 전화를 걸었더니 너는 “그대로”라고 했지. 이어서 이렇게 말했어. “엄마, 무릎에 빨간 점 같은 게 몇 개 생겼어. 이상해.” 엄마는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불안한 마음에 병원에 갔더니 단순한 감기라고 하더라. 약 먹고 3일 뒤에 다시 오라면서. 단순 감기? 그럼 빨간색 뾰루지 같은 건 왜 생긴 거지? 잔병치레나 입원 한 번 한 적 없었는데? 별일 아닐 거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며 다른 병원으로 향했지. 혈액검사, X선 촬영. 뭐든 다 해달라는 엄마를 병원 직원들은 유난스럽다는 눈으로 봤어. 결과는 첫 번째 병원과 같았지. “괜찮다잖아. 엄마….” 너는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려 했어.
병원 응급실에는 교통사고로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는 환자가 많았어. 1시간쯤 흘렀을까. 원피스 아래로 보이는 네 발이 이상했어. 발가락 끝부터 하얗게 변하더라. 그리고 무릎 있는 데까지 계속 올라왔어. 엄마 눈은 말 그대로 하얗게 뒤집혔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학회에서 봤던 사례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빠른 속도로 균이 퍼질 겁니다. 48시간을 못 넘기니 가족들 부르세요. 목숨이라도 살리려면 지금 바로 사지를 절단해야 합니다.”
어느 의사가 말했어. 엄마는 복도가 떠나가라 펑펑 울었다. 절대 네 팔다리를 포기할 수 없다며. 점점 새카맣게 변하면서 딱딱하게 굳어가는데도.
수술을 결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어. 넌 미라 같았다. 항생제를 투여하고 소독약을 발라 붕대로 칭칭 감은 모습. 병원에서는 나를 나쁜 엄마라고 했어. 10월 초가 돼서야 마음을 바꿨다. 울면서 의사들에게 얘기했지. “제발 무릎이랑 팔은 살려주세요.”
수술은 대여섯 시간 걸렸다. 엄마는 널 찾지 못했어. 의사가 가리킨 침대에는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누워 있었다. 깨어나서 넌 해맑게 말했지. “엄마, 수술했으니까 이제 다리가 다시 생기는 거야?”
의사가 희귀병이라고 했던 네 병은 ‘수막구균성 뇌수막염’이더구나. 학교에 제출할 진단서를 뗄 때야 알았다.
“나윤아, 이것 봐봐.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도 짧았거든. 근데도 18세에 수영 국가대표가 되고, 왼발로 글도 쓴대. 발가락으로 피아노도 친대.”
“내가 그걸 왜 봐야 하는데?”
네 반응은 차가웠다. 나쁜 녀석. 컴퓨터도 켤 줄 모르는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찾은 동영상이었는데. 수막구균성 뇌수막염을 이긴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아서 1968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레나 마리아를 보여준 거지. 네가 뭐래도 계속 보여줬지. 말해주고 싶었어. 넌 뭐든 할 수 있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때도 정신교육을 바짝 시켰어. 아직 의족을 못했을 때니까. 누가 놀리면 ‘육백만 불의 사나이’ 다리보다 몇 배 비싼 게 생긴다고 얘기하라고 했지.
휠체어에 태워 널 교실에 들여보내고 보건실에서 신문을 봤어. 좀처럼 집중하기 힘들었다. 쉬는 시간에 종이 울리면 교실로 달려갔어. 화장실이 급하진 않을까 해서. 친구가 “다리병신”이라고 했다며 울었지? 하지만 난 울 수 없었다. 앞으로 계속 겪어야 할 일일 테니까.
엄마는 네게 집안일을 시켰지. 용돈을 주겠다면서. 너는 ‘홈 아르바이트’라고 불렀지? 설거지, 청소기 돌리기, 신발장 정리, 식탁 정리. 나윤이는 참 잘했어. 어쩔 때는 그렇게 물었지. “나 이번 주에 용돈이 많이 필요한데 동생한테 나눠주지 말고 내가 혼자 다 하면 안 돼?”
너는 지금 상상도 못하겠지만, 엄마가 예전엔 수줍음이 많았단다. 어디 가서 큰 소리 한번 못 냈어. 하지만 변했지. 나윤이 덕분에. 한번은 식당에 갔는데 네 다리를 보면서 구석 자리를 주더구나. “왜 여기 앞자리 안 주냐”고 따졌어. 엄만 그렇게 생각했거든. 내가 약해지면 네가 무너진다고.
사랑스러운 내 딸 나윤이는 점점 밝아졌어. 지금은 바지교복을 입고 다니지만, 중학교 때는 치마를 입었잖니. 검은 스타킹을 신어도 약간은 티가 나니까 남들이 쳐다보면 당당하게 얘기했어. “어릴 때 아파서 의족 했어요.” 친구들한테도 그랬고.
한번은 병원에서 어느 아이가 “나윤아, 다리 없어?”라고 물었다. 너는 이렇게 말했지. “난 발이 없는 거지. 다리는 있어.”
퇴원 뒤의 수술 5번도 잘 이겼어. 뼈가 자라서 살을 뚫고 나오면 의족을 할 수 없으니까 1년 반∼2년 단위로 이어졌지. 네가 ‘독한 엄마’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나윤이였다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절대 못했을 거야.
○ 나윤이에게 꿈이 없다고?
요즘은 조금 걱정된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부터 나윤이가 자꾸 자신감을 잃어서 말이야. 문과 또는 이과 선택을 앞두고 네가 그랬잖아. “엄마, 난 꿈이 없어.” 예전에는 의사가 돼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급식을 해주겠다, 앵커가 되겠다, 춤 잘 추는 가수가 되겠다고 하더니…. 커 갈수록 숨으려는 듯해서 겁이 났다.
그래서 마음먹었던 것 같아. 한국수막구균성뇌수막염센터에서 이사로 모시고 싶다는 연락이 왔을 때 수락한 이유 말이야. 이 병에 대해 알리고 예방하기 위한 홍보 활동을 하겠다고 생각했어.
센터는 2010년에 생겼지만 공식적인 활동은 지난달 시작됐어. 환우도 아직 3명뿐이야. 나윤이가 얼마 전에 만났던 이동한 씨(26)와 이정준 씨(24)를 포함해서. 지난달에는 센터가 서울시로부터 비영리 민간단체로 인증을 받았다. 이달에는 세계뇌수막염연맹에서도 승인받았지.
이번 달에 국내 처음으로 수막구균성 뇌수막염 백신이 출시됐어. 하지만 이 병을 모르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50만 명이 감염되는데, 한국에는 2001년 이래 질병관리본부에 131건이 보고됐을 뿐이니까.
홍보활동을 하면 나윤이가 어떤 병에 걸렸었다고 알리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처음에는 망설였어. 네가 혹시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걱정도 들었어. 네가 어렸을 때 사진과 기록을 다 버릴 만큼 엄마에게도 힘든 기억이니까. 하지만 세상에 알리기로 했어. 나윤이를 위해, 그리고 제2, 제3의 나윤이와 가족을 위해.
다음은 엄마들. 인구 10명 중 1명 이상이 수막구균 보균자거든. 19세 전후에 발병하는 비율이 24%. 자녀에게 백신을 맞히고 감기로 오인하지 않게 설명해야지. 수단이나 에티오피아 등 수막구균 벨트 지역(14개국)에 봉사나 파견근무를 가는 시민단체나 기업에도 찾아갈 생각이야.
넌 학생이라 홍보활동을 할 때 아직은 얼굴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지? 괜찮아. 엄마는 나윤이가 다시 씩씩해져서 스스로 용기를 낼 거라고 믿어. 그전까지는 엄마가 열심히 할게. 세상이 이 병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게. 그래서 나중에 나윤이가 사회에 나왔을 때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게.
대구=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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