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를 보고 있노라면 마리아는 적어도 수긍하지 못하는 운명 앞에서 징징거리며 절규나 하다 만 여인 같지는 않습니다. 마리아는 아름다운 남자 예수의 어머니답게 아름다웠습니다. 아들의 주검을 보듬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는 자기 몸을 빌려 태어난 아들과의 인연을 깊이깊이 수긍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 ‘피에타’의 마리아를 보았을 때 나는 청년이 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빛나도록 아름답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무정하기도 하고 매정하기도 한 세월까지 그 여인을 비켜간 것은 그 여인에게는 세월까지 매혹시킨 영원의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 피에타가 김기덕 감독에 의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마리아가 비탄을 삼킨 후 삼매에 든 여인이라면 김기덕의 마리아는 절규하는 여인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마리아가 비탄으로 세상을 품게 된 성모라면, 김기덕의 마리아는 세상의 한복판에 자기를 던진 어머니입니다. 김기덕의 마리아는 활활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에 스스로를 던져 불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쾌하고 불편한 지옥 풍경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묘한 공명을 듣게 되고, 마침내 고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복수는 복수조차 사랑이라고. 사랑이 만든 지옥이라면 그 지옥에는 천상으로 오르는 문이 숨어 있을 거라고.
올 초에 앙코르와트에 다녀왔습니다. 앙코르와트, 그 신성한 4층탑을 기어오르는데 한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4층 천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꼭 3층 지옥을 통과해야 하는구나!
지옥을 모르고 천상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갈기갈기 찢기고 타고 빼앗기고 고립되는 지옥의 시간 없이는 천상에 오를 수도, 천상을 누릴 수도, 지킬 수도 없는 거지요. 사실 고통을 수긍하는 일은 녹록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다치고 붕괴되고 심장처럼 소중한 것을 잃는 지옥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기나긴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며 어느 날 ‘피에타’라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나는 김기덕 감독이 홀연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깊고 큰 사랑을 믿나 봅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의 메시지가 상투적이지 않고 짠했던 것은 자기의 촉수로만 세상을 느끼고 배워온 자의 묵직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속죄할 수 있고, 죽을 수 있습니다. 속죄가 일어나는 그 자리가 세상의 중심, 지성소 아니겠습니까?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