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
2009년이던가.
아버지와 함께 가평의 할머니 묘지를 돌아본 뒤에 쓴 시이다. 그게 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성묘였다. 산을 내려와 기차역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경춘선을 타고 춘천으로, 아버지는 나와 반대 방향 열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돌아갔다. 반대 방향. 아버지와 나의 어긋남. 세 딸 중 누구보다 아비를 닮은 내가, 자라며 아버지와 자주 어긋났다.
아버지와 어긋났던 딸
어려서는 나도 추석을 기다렸다. 보통 때는 먹기 힘든 생선전, 잡채, 송편 그리고 달콤한 약과! 식탐이 심한 내게 음력 8월 15일은 즐거운 명절이자 맛난 음식을 두고 동생들과 전투를 치르는 험악한 날이었다. 살금살금 다락에 올라가 차례상에 올릴 약과에 몰래 손을 대었다. 친척들이 돌아간 뒤에 그 엄청난 그릇들을 치우는 것은 어머니와 어린 우리들 몫이었다. 추석이 오기 며칠 전부터 맏며느리인 엄마는 음식 장만하느라 돈 걱정하느라 속이 타들어가고, 우리 아이들은 새 옷을 얻어 입는 기쁨에 들뜨고, 아버지는 부엌 근처에는 오지도 않았다.
명절상에는 군침을 흘렸지만 절하기는 싫었다. 열 번 스무 번 무릎 끓고 앉았다 일어나기를(시건방진 내가 보기에 아무 의미 없는 동작을) 반복하기가 지겨워, 뒤로 물러나 앉는 시늉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정쩡한 백수로 살던 시절 나는 추석을 잊고 살았다. 어쩌다 집에 있으면 차례를 지냈지만 대개 밖으로 싸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른이 다 되어서도 직장이 없는 나를 친척들에게 보이기 싫었다. 모두가 핏줄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귀성이 서울이 고향인 내게는 낯설었다. 어쩜 모두 같은 날에 이동할 수 있지?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연어의 회귀 같은 민족의 대이동. 스마트폰과 인터넷시대에도 변함없는 귀향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정보통신 강국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은 아직도 농경사회의 전통적인 가치들이다. 시인이 되어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뒤에 나는 가족을 멀리했다. 일산에서 서울이 멀지 않은데도 차례를 거른 적도 많다. 늦게 일어나 서둘러 전철과 택시를 타고 평창동 집에 도착해보면 이미 의식이 끝났다.
자유로이 살다 중년이 되어, 아버지를 대신해 조상의 묘를 관리할 책임이 내게 떨어졌다. 아들 없는 집의 맏딸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따라나선 그 길. 할아버지의 생애를 이야기해주며 쓰윽 웃던 당신. 순하고 모범적인 할아버지 밑에서 어떻게 내 아비처럼 호탕한 풍운아가 나왔는지. 초가을의 투명한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입가의 주름들. 아,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구나. 언덕을 내려오며 나는 또 놀랐다. 아버지가 나보다 걸음이 뒤처지다니.
“나는 백 살까지 살 거다.” 하루 두 시간씩 격렬한 운동을 즐기고, 팔십이 가깝도록 지팡이도 짚지 않고 치과 치료를 받지 않을 만큼 이가 튼튼하고 활기찬 노년을 보내던 아비였기에, 나는 늘 아버지가 건강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를 데리고 가족묘지에 다녀온 몇 달 뒤에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졌다. 반신마비가 온 당신은 지금 요양원에 있다.
나는 다시 가슴이 뛴다
아버지가 쓰러진 뒤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오른팔과 척추를 다쳐 거동이 불편해진 어머니를 모시고 산 지 한 달이 넘었다. 어머니를 돌보며, 나는 사랑하는 조카를 보러 가지 못했다. 보고 싶다, 고 얼마 전에 조카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혼자 쓰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 같아) 어머니를 충동질해 당신의 왼손에도 펜을 쥐여줬다. 아무개야 보고 싶다 할미가. 그리고 이모도 네가 무척 보고 싶다.
최영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