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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트로이 목마 속 병사 비상식량은 당근?

입력 | 2012-09-29 03:00:00

◇당근,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리베카 룹 지음·박유진 옮김·432쪽
1만5000원·시그마북스




 당근은 고대 그리스 서사시와 로마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채소다. 아가멤논의 병사들이 트로이 목마 안에서 지사제로 당근을 먹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일화, 장난기 많은 황제 칼리굴라가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성욕 증진제인 당근을 먹여 그들이 성적으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자 했다는 일화들이 대표적이다. 시그마북스 제공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이튼스쿨 학생들은 1년 365일 점심 저녁을 감자만 먹어야 했다. 그나마 일요일 하루 나오는 자두 푸딩으로 ‘감자 지옥’을 면할 수 있었다. 불운의 씨앗은 열렬한 감자애호가 파이 헨리 채바스가 쓴 책이었다. 1844년 베스트셀러 ‘자녀 양육에 관해 어머니에게 들려주는 조언’ 속 “푸슬푸슬하도록 푹 삶긴 묵은 감자야말로 어린이가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채소다”라는 문장 하나 때문에 학생들은 싫으나 좋으나 감자를 섭취해야 했다.

같은 감자지만 지역에 따라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역사도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성경 속에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자가 금단의 열매 취급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인들이 감자를 전해준 뒤 19세기 말 천황이 시식하기 전까지 2세기가량을 소 사료용으로 썼다고 한다.

책은 감자를 포함해 매일 식탁에 오르는 스무 가지 채소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격식 있는 고매한 역사서라기보다는 ‘채소를 매개로 한 잡학상식교양서’에 가깝다. 미처 몰랐던 채소와 관련된 세계사적 사건들의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콩이 출현하면서 전쟁과 전염병으로 얼룩졌던 중세 유럽의 암흑기가 사라졌다는 내용, 아가멤논의 병사들이 트로이 목마 안에서 설사를 멈추게 하려고 당근을 먹었다는 일화 등이 펼쳐진다. 채소와 관련된 격언이나 고대부터 현재까지 아우르는 레시피의 변천사는 덤이다.

오랜 기간 오해를 받아온 채소의 사연들은 기구하기까지 하다. 가지의 별명인 ‘발광 사과’ ‘미친 사과’는 먹으면 바로 발광하게 된다는 오해에서 유래했다. 가지를 처음 맛본 서양인이 날로 먹어 치우고는 곧바로 발작을 일으킨 게 화근이었다. 훗날 실제 병명이 급성 위염으로 밝혀졌지만 한번 ‘불길한 채소’라는 프레임에 박힌 가지는 오랫동안 억울한 누명을 써야 했다. 존 밀턴의 ‘실락원’에서는 사탄 루시퍼가 타락 천사들에게 먹이는 채소로 등장하기도 했다.

지식과 음담(淫談)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점도 책의 묘미다. 거의 모든 장에 걸쳐 채소가 강장제와 정력제로서 어떤 효능을 발휘하는지를 상세히 소개한다. 아스파라거스를 설명한 대목이 특히 압권이다. “아스파라거스는 역사적으로 순전히 성적인 음식이었으며 최음제로서의 명성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도입부부터 솔깃해진다. 남성의 성기를 닮은 줄기가 외설스러워 감수성 예민한 10대들의 상상력을 자극할까봐 19세기 프랑스 여학교에서는 배식을 금지했다는 웃지 못할 역사도 있다. 인도의 전설적 성애 교본 ‘카마수트라’에서 시들해진 연인들의 원기를 북돋는 ‘아스파라거스 페이스트’ 레시피도 소개된다.

책 속 내용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들거나 채소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과 관련된 역사를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악마의 정원에서’(생각의 나무)를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특정 사회에서 악덕과 관련 있다는 이유로 금기시하는 음식들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7대 죄악과 상응하는 항목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당근…’에 맛보기로 등장하는 채소 혐오론자들의 비상식적인 주장과 연결해가며 읽어도 좋겠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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